2007년 7월 10일 화요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1)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1)본문 / 롬3:21-24

가족을 위해 상점의 판매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반복해 오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속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문 밖에서는 그의 출근을 재촉하는 부모와 여동생의 소리가 들리고,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상점에서 지배인이 달려와 출근을 조릅니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이들의 부름에 어제처럼 자신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부모님과 여동생, 지배인은 잠겨 있던 방문을 강제로 열고 방으로 들어 온 순간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보고 아연 실색을 하게 됩니다. 이들로부터 한낱 독충으로 취급당하게 된 그레고르는 벌레로서 새 생활에 적응해 보려고 애써 봤으나 그럴수록 가족들의 냉대는 날로 심해갑니다. 그레고르가 돈을 벌 수 없게 되어 생계에 위협을 느낀 식구들은 결국 하숙을 치기로 하고 여동생의 방을 정리합니다. 여동생은 내다팔 수 없는 모든 그녀의 잡동사니는 그의 방으로 옮겨 놓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림에 달라붙은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기절하고,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사과를 그에게 던집니다. 사과에 맞은 상처로 그레고르는 한 달 동안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죽어 갑니다. 어느 날 그의 죽음을 확인한 할멈은 가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좀 가 봐요, 저것이 뻗었어요. 저기 자빠져서 그만 뻗어 버리고 말았어요!" "죽었다니?" "죽은 것 같아요." ...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거야." 그리고 가족 모두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습니다......., 이는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대략의 줄거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곧 방금 제가 말씀드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며 기족으로부터 대접 받았던 그레고리 잠자가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가 되어 가족들로 버림받고 멸시받게 되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지 못했다는 직접적인 의미는 첫째.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둘째.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시 그 영광의 자리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사람이 처음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데, 이를 잃어버렸고, 이것을 회복하기위해 사람이 가진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도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빼앗아 갔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로마서 강해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사람이 왜 죄인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법에서 말하는 의는 법을 모든 법 조항을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이 법 조항을 다 지킬 수 없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율법을 받은 유대인은 그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의 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슬퍼하고 괴로워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요 복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 영광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를 꿈꾸는 은혜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쉽게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영광은 하나님의 본성적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⑴ 하나님의 영원하심(시90:2) ⑵ 하나님의 불변하심(약1:17) ⑶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욥42:2) ⑷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시139;7-9) ⑸ 하나님의 인애(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심(시103:8) ⑹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벧전1:16) ⑺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마5:48)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7가지 가운데, 앞에 4가지는 오직 하나님만 가지신 영광의 속성이지만, 뒤의 3가지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나눠주신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회복해야 함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와 그에게 주어지는 권세’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요1: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인 인애 부분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2.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인애는 히브리 말로 ‘헤세드’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헤세드를 인칭대명사로 부르면, ‘헤시드’가 되는데 이 말은 구약에 여러번 나옵니다. 어떤 곳에서는 ‘성도’ 또 다른 곳에서는 ‘경건한 자’로 번역했습니다. 시편 4:3에“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고 했는데, 여기서 경건한 자는 곧 헤시드입니다. 또 시편 30:4에 보면“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 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말은 원어로 헤시드입니다. 신약에서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것처럼 구약에서는 헤시드라고 부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 즉 헤시드는 인애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장미꽃에는 장미꽃 향기가 국화에는 국화 향기가 있고, 축구선수는 축구를 잘하고 야구 선수는 야구를 잘 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향기를 풍겨야 하고 사랑을 베푸는 선수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성도가 되라는 말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애를 회복하는 성도가 되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인애는 하나님의 영광의 특징이며, 또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인애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세상 살맛이 나고 예수 믿는 즐거움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은혜가 넘치고 각양의 복이 쌓이게 됩니다.
3. 인애가 교회에서 사라지면
첫째. 이가봇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가봇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뜻입니다(삼상4:22) 이가봇 현상이라 함은 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것입니다.(삼상2:17) ⑵ 성적 윤리적 타락을 말합니다.(삼상2:22-23) ⑶ 불순종입니다.(삼상2:25) ⑷ 경고 받고 책망을 받아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삼상2:27-36) 이가봇 현상은 말세현상입니다. 결국 심판받아 멸망하고 맙니다.
둘째. 교회가 영혼 살리는 일을 포기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가운데 하나가 복음 전파를 통하여 죽은 영혼은 살리고 잠자는 영혼은 깨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애 즉 사랑과 희생은 죄인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인애가 사라지면 교인을 돈으로, 머릿수로 보는 작태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주일학교나 중고등부, 청년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헌금을 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쓰는 부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후부터 주일학교 성경학교가 시작 됩니다. 그리고 7월 둘째 주에는 중고등부 수련회가 있습니다.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교회는 영혼을 살리고 또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을 돈 지갑으로 보는 순간부터 그 교회나 교역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셋째.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됩니다.
마 5:13에 보면 “너희는 소금이니 소금이 맛을 잃으면 ...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방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인애가 교회에서 사라진 결과입니다.
4. 무엇이 인애인가?
첫째.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왜 인애가 하나님의 영광의 속성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는데 심지어 독생자까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광하면 번쩍 번쩍 빛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 얼굴에 광채가 났던 것처럼, 우리 얼굴에서도 광채가 나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인애입니다. 예수께서도 이 땅에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은 성도는 ‘내게 무엇이 없는가?’를 생각지 않고 ‘내게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한 가지라도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베풀고 섬기면 됩니다. 벳세다 들녘에서 꼬마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 한 방울, 그것들로 베풀고 섬겼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앉은뱅이에 명령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큰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매우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최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롬12:15에“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웃는 것과 웃는 것 어느 것이 어렵습니까? 웃는 자와 함께 웃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3장에서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기와 다툼 때문에 남이 잘 되었을 때 함께 웃어주지 못합니다.
셋째. 주님과 이웃을 향한 희생과 헌신이 인애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가장 크게 나타내셨을 때가 언제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말씀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을 때?,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와 각색 병자를 고치셨을 때? 아니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을 때 입니까? 많은 분들은 엄청난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셨을 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신의 영광을 가장 크게 나타내신 때는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많은 성도들은 자신이 잘되고 높은 지위를 얻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을 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또 자신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진정 하나님의 영광은 성도가 인애를 베풀 때, 즉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고 헌신 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희생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닭을 키우다 보면 어미닭이 알을 낳다가 피를 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려면 옆에 있는 닭들이 피를 본 후 그 닭의 항문을 쪼아 결국 이 닭은 죽게 만듭니다. 일본의 이지메, 한국의 왕따, 이는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두지 못하는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페리컨이라는 새는 큰 입에 먹을 것을 잔득 넣고 와서 막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들에게 주다가 이것이 부족하면 자신의 몸을 이들이 뜯어 먹도록 내어 맡깁니다.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는 존재,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입니다. 넷째.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인애입니다. 잠10:12에“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롬4:7에 보니“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타인의 허물과 죄를 가려주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덮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노아의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있을 때 함은 이를 희롱했지만, 셈과 야벳을 뒷걸음질로 가서 그 아버지의 치부를 옷으로 덮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함은 저주를 받았고,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습니다. 힘은 쓸수록 길러집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인애가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인애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왼손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글씨도 쓸 수 있고 칼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못하는 것은 왼손을 자주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순간 주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데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면 주십니다. 기도 할 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말씀에 순종 할 때 은혜가 임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도는 은혜 받는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은혜가 제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 준비해 놓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애가 사라진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가봇 교회가 되고 맙니다. 은혜를 받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합니다. 은혜를 받은 교회는 인애가 넘치는 교회입니다. 인애가 넘치는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교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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