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4). 본문/롬3:21-24프로이드는 그의 문명 비평서「문명과 불만」에서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언젠가는 썩어 없어 질 뿐 아니라 위험 신호로서 불안이나 아픔으로부터 오는 신체적 고통. 둘째로, 무자비한 파괴력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내외적 세계로부터의 고통 그리고 셋째로,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들과의 관계로부터 받는 고통이다.” 라고 했습니다. 프로이드는 이 세 가지의 고통 중 가장 아프고 괴로운 고통은 세 번째 고통인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소외감”이라고 했고, 쇼펜하우어는“가진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것이 고통이다. 예컨대, 건강, 청춘, 자유도 그것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지만, 일단 그것을 잃으면 비로소 느끼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내가 고통하는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인생론에서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했으며,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캠피스는 “때때로 고통당하는 것이 좋다 왜냐면 그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음을 상기 시켜 주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은 즐거움의 근본입니다. 왜냐면 고통을 모르고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괴롭고 매우 아픈 것이지만, 이 고통이야 말로 우리 자신이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고, 인간답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시 때문에 그 고통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소경으로 태어났느냐”고 제자들이 묻자,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 소경된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9:1-3)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이 있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죄라고 했고, 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 갈 길을 모릅니다. 또 다른 문제는 돌아가려고 하는데 방해자가 있어 길을 막고 있으며, 죄가 있는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모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충돌하여 영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 이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길이 되십니다.(요14:6)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는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신 우리의 왕이십니다.(요일3:8)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제물이 되셨습니다.(히9:14)우리를 위해 행하신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부활하시므로 가능케 되었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통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길을 열어 놓았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본래의 모습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을 향하여“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최초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권세, 이 세상 삼라만상을 다스리는 권세였습니다.(창1:26-27)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였듯이 아담이 동식물의 이름을 부르는 그대로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이 모든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대신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했습니다. 고생 고생하며 살다 죽어 지옥에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한 인생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잔잔케 하는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이 놀라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고, 예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고 했습니다. 이 능력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일어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그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능력 그리고 권세 또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왕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선지자와 제사장의 권세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가 회복되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칭찬과 존귀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롬8:30에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완벽하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원하시며 또 죄를 지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영광은 하나님의 본성적 특징이며,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좀더 세분하면, ⑴ 하나님의 영원하심(시90:2) ⑵ 하나님의 불변하심(약1:17) ⑶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욥42:2) ⑷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시139;7-9) ⑸ 하나님의 인애(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심(시103:8) ⑹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벧전1:16) ⑺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마5:48)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에 대해 듣고 전하면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을 닮고, 회복하기를 꿈꾸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이란?⑴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시며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행하신 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적 특징은 거짓이 없고, 두 마음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오늘 말씀하신 바를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내일 바꾸시지 않으며, 약속하신 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키시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⑵ 하나님은 온전하시다. 이 말을 가장 잘 해석한 히브리어는 샬렘과 탐밈이며, 헬라어에서는 텔레이오스입니다. 샬렘은 완전한, 건강한, 가득찬 이란 뜻을 지닌 말이며, 탐밈은 완전한, 흠없는, 진실한, 경건한, 더럽지 않은 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또 텔레이오스는 완전한, 완성된, 장성한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로 통하여 볼 때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란, 흠이 없고 시비할 것이 없으며 언제나 옳고 바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저울추가 완전한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에 기준이 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온전하심은 어떻게 표현되는가?⑴ 아멘의 하나님아멘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진실의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원하심에 대한 인격적 응답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아멘은 3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첫째, 아멘은 진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56:16에“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의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입니다. 특별히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아멘이라고 했습니다.(계3:14에“아멘이시오 충성된 증인이시오”) 이와 같이 아멘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된 인격을 표현 할 때 그리고 말의 내용이 진실임을 증명 할 때 아멘이라고 했습니다.(왕상1:36, 렘28:6) 둘째, 동의의 표시입니다. 고후 1:20에“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 회중은 한 목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셋째,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라는 소망의 표현입니다. 순종의 표현이 아멘입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와 성령으로 자신의 몸에 예수께서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아멘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맹세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절대 복종을 나타낼 때 아멘이라고 말합니다.(느5:13)①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아멘입니다. 고후1:20에“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모든 것이 진리이며, 예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로 그리고 시편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이 약속은 무려 454회나 성경에 기록되었는데, 그 약속대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눅2:47)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아멘입니다.(히1;1-2)② 예수 그리스도가 아멘입니다. 고후1:19에“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아멘 하여 순종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6:38-39에 보니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라고 했고, 마26:39에서는”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앞에 아멘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 할 때, 우리 자신들에게 신실함과 온전함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아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에 대하여 아멘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명령 앞에 아멘 해야 합니다. 주님의 온갖 약속 즉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복을 바라보며 아멘 해야 합니다. 최후의 소망 즉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아멘 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⑵ 미쁘신 하나님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고 했고, 히10:23“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지고 또 주님을 부인 할 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붙잡아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각양의 복을 주시고 천국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믿을 만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히7:14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고 번성케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복 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는데, 사라가 너무 예뻐서 애굽 왕이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고 애굽 왕으로부터 지참금을 많이 받고 팔았습니다. 또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라의 몸에서 낳은 자식이래야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라는 말씀을 들은 후 여종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행동, 믿음의 조상으로서 격에 맞지 않은 삶을 살았음에도 하나님 그를 버리지 않고 고쳐서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을 절대 바꾸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붙잡아 주시고 잘못된 부분은 고쳐서 쓰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복을 주시려고 하는데 복 받을 만한 그릇을 준비하지 않고 있거나, 복 받을만한 삶을 살지 못할 때, 때로는 책망하시고, 대론 어르시고, 때론 격려하시며 우리를 고치셔서 결국 복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롬8:38-39에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⑶ 전능하신 하나님온전하심과 신실하심은 반드시 힘이 있을 때 가능 한 일입니다. 약속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이유는 그가 전능하신 분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롬8:28에 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은 초콜릿 과자의 모든 재료가 연합하여 초콜릿 과자의 맛을 내는 원리와 같습니다. 여러분 초콜릿 과자의 재료들을 시식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쵸콜릿 과자를 만들려면, 생 계란이 들어갑니다. 소금, 베이킹 소다, 밀가루, 쓰디쓴 초코릿 등이 필요합니다. 생계란 맛은 어떠합니까? 소금과 베이킹 파우더는 그냥 도저히 먹을 수 없습니다. 밀가루도 마찬가지 입니다. 각 재료들은 과히 좋은 맛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원료가 합쳐지고 오븐에 구우면 쓰고, 시고, 짠 맛이 합쳐져서 새로운 훌륭한 맛을 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행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요소들은 때론 쓰고, 때론 시고, 때론 불행하기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결합되어 주님의 사랑의 열기를 받으면 훌륭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막9:23)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큰 꿈을 가지고 도전합니다. 큰 꿈은 인간적 측면에서 볼 때 불가능한 꿈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즉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꿈을 성취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다. 둘째. 해야만 한다. 셋째. 해내야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결단이 중요합니다. 2차 세게 대전 중 독일은 영국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절박한 멸망에 직면하여 윈스턴 처칠은 영국 국민들을 향해 “마지막 피를 흘리기까지 조국의 지상과 바다와 공중에서 전투를 계속할 것이라.”고 연설 했습니다. 처칠의 목숨을 건 저항과 결단은 영국 국민들을 고무시켜 싸움의 의지를 불러일으켜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미리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해 보지 않은 채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실패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시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승리를 거두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일생 동안 선한 싸움을 싸웠다”(딤후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까? 믿음으로 도전하며 시도하며 행하기를 주저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교회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으로 간구하고 도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아멘이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미쁘신 하나님,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 복 주신다고 약속 하신 후 복 받을 만한 사람으로 고쳐서라도 복 주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전능하셔서 무엇이든 가능하신 하나님, 믿는 자들에게 결코 실망을 안겨주시지 않는 하나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형상을 본받고 회복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아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입가에 더 이상 부정적인 말이나 비판하는 말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항상 아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날마다 도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실한 사람, 믿음이 가는 사람, 만나면 만날수록 매력이 있고 신뢰가 가는 사람,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란 말처럼 한번 제일의 맨은 영원한 제일의 맨이 되는 사람,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꿈꾸어야합니다. 주님의 미쁘심을 본받아 한번 시작한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랑이 천국에까지 인내하며 함께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피차 뜨겁게 사랑하며 포기하지 않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도전하며, 한 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이루어 내는 능력 있는 성도와 교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목표로 추구할 때 이를 이뤄가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회복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처럼, 바울처럼 멋있는 성도, 능력 있는 성도라는 칭찬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별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뉴질랜드의 유명한 등반가였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에 접근 할 무렵 무시무시한 눈보라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를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하룻밤을 지새운 후 다음날 아침 일찍 그를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은 휘날리는 눈보라 속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격 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일제히 전 세계를 향해 “힐러리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라고 타전했습니다. 우리들에 대해서도 “마침내 제일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다.” 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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