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믿음의 능력(2)

믿음의 능력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
본문/롬4:1-25
현대인들은 과학적 합리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과학적으로 증명 된 것, 역사적인 것,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만을 인정하고 믿으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고 하여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이는 하나님은 믿을 가치가 없고,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자이고 속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일5:10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 고 했습니다. 이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의 약속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컨대,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름이 뭐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두식" 이라고 제가 말했을 때, 여러분이 가볍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못 믿겠어요." 그러면 저는 여러분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라 볼 것입니다. 그런 후, "어디에 삽니까?" 라고 묻자 “과테말라에 삽니다.” 라고 제가 대답 했을 때, "그것도 믿지 못하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저는 아마도 매우 화가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자신이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판단이 되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께 한번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거부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끼실 모욕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지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믿음을 통해서 평강과 안식을 얻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1. 믿음이란 무엇인가?믿음이라 함은 히브리 말로 ‘에문’인데 이 말은 ‘아멘’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참, 진실, 확신, 과연 그러하다는 응답, 안정, 견고’등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헬라말로 ‘피스티스’인데 ‘신실, 충실, 안정, 견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일반적인 뜻은 나를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 즉 누구를 믿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컨데, 부실한 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강한 믿음을 갖는다 해도 모든 돈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실한 은행에 예금한다면, 약한 믿음으로 맡긴다 해도 그것은 아주 안전합니다. 돈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은행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시사 믿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첫째. 평안을 가져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믿지 못하면 불안 합니다. 초조합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운전기사를 믿지 못할 때 차 안에 앉아 있는 동안 평안히 여행 할 수 없습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중에도 가스렌지나 가스통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없으면 마음대로 이를 사용하여 요리할 수 없습니다. 요리하면서도 불안합니다. 차에 타서 코를 골면서 잘 수 있는 것은 운전기사가 안전운행을 해서 내가 가려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평안 가운데 한 평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담대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가운데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매우 망설여집니다. 뭔가를 하면서도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겁이 나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믿음 즉 확신이 있을 때, 담대하게 일을 추진 할 수 있습니다. 막4:40에 보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믿음의 대상과 바른 관계를 유지시켜 줍니다.
인간관계는 믿음의 관계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물 한 잔, 밥 한 그릇,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아프면 약을 사 먹을 수도 없고 의사에게 내 몸을 믿고 맡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고, 아내가 남편을 믿고, 이웃과 이웃, 친구와 친구, 스승과 제자, 나라와 백성, 이 모든 관계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바른 관계가 성립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자연적인 믿음과 초자연적인 믿음이 믿음에는 자연적인 믿음과 초자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믿음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믿음 즉 일반적인 믿음은 사람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간 상호간의 믿음을 말합니다. 서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빵집에서 파는 빵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어떤 사람과 12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그 사람이 그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올 것이라는 믿음등과 같은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신뢰합니다. 일기 예보를 믿거나, 신문을 믿거나, 비행기를 탈 때 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조종사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깁니다. 우리는 역사책을 신뢰하고, 의학책을 그리고 승강기를 신뢰합니다. 하지만 비행기와 승강기는 때로 추락하기도 하고, 역사책은 정확치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는 인생의 근본문제인 영혼의 구원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믿음, 일반적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정확하고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믿음, 결코 실망시키거나 믿는 사람에게 낭패를 가져오지 않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특별한 믿음 즉 초자연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초자연적인 믿음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믿음입니다. ⑴ 초자연적인 믿음의 근원아무리 큰 강 물줄기이라도 그 근원은 깊은 산골짜기의 작은 냇물이거나, 샘에서 솟는 물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이처럼 귀한 믿음도 근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근원은 첫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롬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셋째. 믿음의 근원은 성령님이십니다. (고전12: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믿음이 생성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⑵ 초자연적인 믿음의 내용이 초자연적인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고백하였던 사도신경입니다. ① 전능하신 하나님 ② 동정녀로 탄생하신 예수 ③십자가 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④ 부활 승천 다시 오실 예수 ⑤ 성령의 교통, 교회,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바울의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 속에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믿음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었던 아브라함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다듬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 모두를 아브라함과 같이 변화시켜 이시대의 아브라함으로 살게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고 했고, 23-24에서도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이 받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와 복
⑴ 죄를 가리우심을 받아 의인이라 인정받음이 세상에서 죄로부터 자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그 또한 연약한 죄인임이 분명합니다. 본문2-3절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6-8절에 보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은 시편32편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밧세바라는 여인과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죽이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자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죄가 가리워진 것입니다. 이 32편은 다윗이 큰 죄를 용서받은 즉 덮어진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서 지은 시입니다. 여기서 덮어준다는 말은 가리워 준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는 있지만, 없는 것 같이 취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속죄란 히브리어로 카팔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지성소를 시은좌, 즉 은혜를 받는 곳이라는 뜻이며, 특별히 이 법궤의 덮개를 속죄소 라고 합니다. 죄를 덮어서 죄가 보이지 않게 한 후 용서해 주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의 속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4:8에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왜 기독교가 복되고 기쁜 복음의 종교입니까? 그것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용서 즉 사함을 받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제사장이 속죄소 위에 양의 피를 부음으로 그 피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한 것처럼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는 은혜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⑵ 의인됨의 중요성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죄가 덮어지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롬5: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사람인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평,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으며, 히4:16에서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각양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시다 시피 인간관계에서도 화목, 즉 화평이 없으면 절대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만약 부부관계에서 화평이 깨지면 급기야 갈라 설 수밖에 없고, 회사도, 나라도, 교회도 화평이 깨지면 은혜와 능력이 사라지고 시험에 듭니다. 이 화평을 가져오는 원동력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롬5:1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누리자’는 말은 즐기자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화평의 복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⑶ 화평의 복을 누리라
① 복을 구하라
아무리 좋은 집이 있어도 들어가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며,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먹어야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을 구하고 받아 누릴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 100여 년 전 미국에서 최고로 구두쇠로 꼽히는 히티 그린이라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독자 하나를 두었는데, 다리에 병이 나서 수술을 해야 함에도 수술을 하지 않아 결국 한쪽 달리를 짤라내고 평생 절뚝발이로 살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죽으로 연명했으며,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은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니 통장에 1억 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100년 전 1억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통장에 1억불 아니 100억 불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11일) 판 한과정보에도 실린 기사로서 원래는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 신문 11월 10일에 실린 내용입니다. 그 제목은 “Judge gives miser's millions to charity” 입니다. 루이스 스미스라는 기자의 기고에 의하면 평생 자식들 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수전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옷은 항상 남이 입다 못 입는 헌옷을 사서 입히고, 생일 선물도 중고품 가게에서 사다 주면서(They were all brought up in second-hand clothes and got second-hand birthday presents) 평생 모은 돈 400만 파운드(한화 약 80억)가 자식들에겐 한 푼도 돌아가지 않고 모두 자선단체에 강제로 기부하라는 법원의 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이 수전노의 이름은 레지라드 하워드인데, 지난 99년 90세의 일기로 죽으면서 자신이 평생 모은 이 돈과 골동품을 자신의 이름을 딴 박물관을 만들어 달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유품을 전리하며 하워드가 평생 모은 골동품은 영화 치티치티 방방에 쓰였던 소품 자동차와 그 외 한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동사니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박물관을 세우고 싶어도 전시 할 물품이 없자 3명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유서가 실현 불가능함으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할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으나, 법원은 아버지가 박물관을 세워달라는 것은 곧 이 돈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이 있다고 봐야 함으로 400만 파운드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옳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현재 이 세 자녀들은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정부 보조금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에 자녀들은 “평생 단 한푼에 벌벌 떨었던 아버지가 전 재산이 자선단체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올 것”(He’d be turning in his grave if he knew that all his money went to charity)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린 할머니와 하워드 할아버지를 비난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부요가 있고 구하기만 하면 어마 어마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해, 나는 가진게 없어, 나는 무능해’한다면 앞에서 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농협 쌀 창고에서 생쥐가 굶어 죽었다면 이는 생쥐 책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16:17-18을 통해 믿음으로 구하고 받아 누리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사실을 믿고 지금부터라도 믿음으로 선포하고, 구하여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라
본문17-21에 보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얼마든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라가 나이 많아 석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과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실 것을 믿었고, 100세 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 가운데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자, 주저 없이 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죽은 자를 다시 살리 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기나 암은 똑같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성경 말씀과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우리의 믿는 바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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