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5일 금요일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본문 / 엡5:22-33
<타임>지에서 25년 이상 근무하는 동안 백악관 담당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여성방송인재단 이사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저널리즘스쿨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보니 안젤로가 쓴 책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란 책에 보면, 미국 근대 대통령들의 성격과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11명의 어머니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그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칭찬과 벌을 통해 아들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불어넣은 활기찬 실천가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스벨트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고집쟁이 민주당원 마사 트루만, 열정적인 평화주의자 아이다 아이젠하워와 용감한 여성 도로시 포드, 진솔한 평화봉사단원 릴리언 카터 등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어머니들의 교육과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지미 카터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 첫날,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백악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조지아 주 지사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중앙 정가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인물이었기에 기자들로선 그 '시골뜨기' 무명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의 입에서 어떤 취임 소감이 나올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기자들에게 카터는 대뜸 "내 어머니부터 만나보라"며 곁에 있던 79살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 여사를 소개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으나마나 싶은 질문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죠?" 그러자 릴리언 카터는 태연하게 "어느 아들 말이야?" 카터 여사에게는 장남 지미 말고도 차남 빌리가 있었지만 빌리 카터는 세상의 잣대로 따져 '성공'했다고 말할만한 사람도, 형 지미에 견줄만한 이력을 가졌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릴리언 카터가 백악관 기자들에게 던진 유머는 모든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입니다. 카터여사에게는 대통령이 된 아들이건 그렇지 못한 아들이건 간에 자기가 키운 아이들은 똑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메시지가 그 유머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릴리언 카터는 고령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미스 릴리언'이라 불렀을 정도로 활기 넘치고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과 인권에 대한 헌신이 남달랐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평화봉사단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단원이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아들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68세의 그녀는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고 인도까지 가서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귀국 후에는 남부 흑인들과 빈민을 삶을 극진히 살핀 간호사로 평생을 보내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항상 '미스 릴리언'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과 영향을 받은 카터는 대통령 재임 시에도, 퇴임한 후에도 평화와 봉사를 삶의 이정표로 여기고 섬기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에게 존경받고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는 영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거나 유명한 사람 뒤에는 항상 아내가 훌륭하다든지,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말은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훌륭해서 자녀가 유명인사가 되었다든지 혹은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 만큼 아버지들이 자녀 교육에 소홀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남자들은 은근히 화도 나고 속도 상할 것입니다. 왜냐면 남자들도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헌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남자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왜 남자들의 희생은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 됩니까? 그것은 남자들이 희생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헌신이 2%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2%의 부족은,

첫째. 무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이 무엇을 뜻하는 지 100%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결혼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그 첫 번째 대답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푹 빠졌어요." 일단 멈추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그들은 계속 행복 할 것이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에 감동되고 도취됩니다. 이는 소설과 극장이나 TV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연속극에 의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장되는 것입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고 평생토록 남편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창2:24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했고, 오늘 본문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반드시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하나의 파트너(Partner)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동업자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아내를 좋은 짝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짝은 각각 다른 존재인데 합해진 경우입니다. 짝에는 두 개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좋은 짝이 아니라 내 몸입니다. 하나입니다. 결코 아내와 남편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 할 때부터 이미 결혼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내는 남편의 일부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지으셨습니다. 만일 아내가 파트너요, 짝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버리고 다른 파트너, 다른 짝을 찾으면 됩니다. 오늘날 이혼율이 높은 이유가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아내를 몸의 일부요,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편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음 과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욕되게 합니다.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몸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욕되게 하면 반드시 후유증이 심각해집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아내를 무시하는 것 때문에 많은 아내들이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혼한 남자는 결코 혼자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아내를 동반해야 되고 아내를 배려해야합니다.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과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에 있어서, 혹은 남편 혼자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사에 아내와 함께 해야 합니다. 아내는 집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가정은 남편이 잠자러 들어오는 기숙사가 아닙니다. 아내가 내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금만 더 배려하시면 100점짜리가 됩니다. 부족한 2%를 채우시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오늘 본문24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죽기까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 남편을 위해 죽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들이 최선을 다해놓고 마지막 순간, 즉 죽어야 될 순간에 죽지 아니해서 그 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사망의 뜻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부인을 말합니다. 남편들이 자기를 부인함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의 구체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직장에 다닙니다. 열심히 일했음에도 승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 친척이라는 젊은 사람이 그 부서의 팀장으로 낙하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상사, 나이도 10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사장 친척이라는 이유로 부임을 하더니 날마다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모욕도 주고 그따위로 일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합니다. 속에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다닐 직장이 없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만둘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천진난만한 애들과 아내가 반겨줍니다. 속도 모르고 우리 아빠 최고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참고 견딥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창피함도 버리고, 다 버리고 나 죽었소! 합니다. 묵묵히 참고 직장을 다닙니다. 나 혼자 몸이라면 정말 당장 집어 치울 수 있지만 가족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집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 사람들은 침을 뱉었습니다.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욕을 퍼 부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옷을 벗기어 벌거숭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신 예수님은 이 모는 수치와 치욕 그리고 죽음까지도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감수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나 일부 남편들 가운데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던져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일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존심을 더 내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자신을 황제로 대접받으라고 부추깁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고,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보다 자기가 더 우선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일이 잘 될 때는 가족도 생각하고 아내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고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오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 내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래서 요즈음 자살하는 남편들이 많고, 집을 나와 노숙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놓고 무책임하게 버리는가? 하면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합니다.

사람 속에 거하는 죄는 희생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기 생각만 하게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고 했지만, 도움 받고 싶은 거지 근성을 발동시킵니다. 아담이 죄를 범 한 후 하나님께서 왜 죄를 지은 지었느냐고 물으니 하나님 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줌으로 먹었다고, 하나님과 하와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은 하와를 보자 "당신의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각종 핑계를 만들어 자기 합리화하게 합니다. 시대 탓, 환경 탓, 아내 탓, 심지어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합니다. 자기 잘못은 없습니다.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유혹과 자기연민을 이기지 못해서 남편의 의무인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마치 장애물로 취급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 여자 말고 다른 여자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이 문제 즉 죄의 유혹,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주님으로 모셔드리는 길 뿐입니다.

셋째. 좋은 모델이 없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술 먹고, 상 엎고, 소리 지르고, 아내를 때리는 남편, 아버지는 많이 보았는데 목숨 걸고 아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남편들을 보고 들은 적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좋은 남편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아내들을 많이 두었고, 위험한 순간에 아내를 보호하기 보다는 부인을 이용해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좋은 남편의 예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부족함에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누더기와 같고 언제라도 배신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열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29-30절에서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했습니다. 왜냐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3:7) 여러분의 아내가 체질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습니까? 성격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어 신경질적입니까? 아내의 약한 부분은 남편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면 약한 사람은 질병에 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화를 내면서 병에게 욕을 하고 꾸지람을 합니까? 아닙니다. 침대에 편히 누워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합니다. 이럴 때 몸은 병을 이깁니다. 이와 같이 아내의 연약과 아픔을 내 몸이 아플 때와 같이 보호해 주고 치료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 교회를 사랑했다면 연약한 남편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남편들이 힘들고 남편 구실을 잘 하다가도 넘어 집니까? 그것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 힘이 빠지고, 진이 빠져 낙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아 교회를 사랑하고 보호하셨듯이 남편들도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고 했습니다. 주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철야기도도 하셨습니다. 무시로 성령안서 기도했습니다. 남편 여러분이 기도할 때 가정이 삽니다. 아내가 삽니다. 자녀가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남편은 가정의 머리로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능력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⑴
엡5:15-6:4

사람들에게 백두산의 제일 큰 소나무는 몇 그루일까요?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즉시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백두산에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저도 백두산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한 그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몇 개일까요? 하나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제일 좋은 것은 두 개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 보면 사람들은 믿음, 사랑, 전도, 예배, 기도 등 여러 가지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도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그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에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계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부부가 다투고 어찌 가정이 바로 서겠으며,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어찌 교회가 바로 세겠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끼리 다툰 다면 과연 선교가 되겠습니까? 인간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드릴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내려놓은 먼저 형제와 사과 한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회복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고기타는 냄새가 너무 싫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조하셨는데, 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제물로 바쳐진 고기타는 냄새가 싫다고 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이 다투고 서로 미워하며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관계가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모범을 따라 가정이 바로 세우는 비밀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가정이 바로 세워지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의 바르게 유지하여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먼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는 첩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했고, 23절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간에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법 또한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계신 여성여러분! 특별히 아내 되시는 성도님들께 먼저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에게 정말 복종하시며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여기십니까? 또 자녀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께 순종하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대부분 ‘아니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나이 드신 부부가 스피드 퀴즈 게임에 출연했습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내고 할머니가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무제를 보신 할아버지가 “당신과 내 사이를 뭐라고 하지?” 그러자 할머니는 거침없이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두 자가 아니고 네 자로 말해봐!”라고 하시자 할머니는 “평생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답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평생 웬수로 알면서도 함께 살았을까요? 부부가 평생웬수가 아닌 평생 은인으로 살수는 없을까요? 오늘날 많은 부부가 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불순종이 죄라는 사실을 몰라서 복종치 않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아담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하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아담의 말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창3:16에 보니 “내가 네게 임신의 수고로움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네가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3:16)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타락 이후로 아내들은 항상 남편을 지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남편에게, 부모에게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준비된 것은 형벌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둘째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해서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은 후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현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창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해서,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왜냐면 사랑은 혼자 할 수 없고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독처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돕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따라 주어야 합니다. 이는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돕는 일 즉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을 버리고 남편을 다스리려고 하니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을 돕는 일, 즉 남편의 부족과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아내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를 축원합니다.

셋째, 너무 가까워서 불순종합니다.
부모와 자녀사이는 천륜이라고 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또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부가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가깝습니다. 모든 허물을 다 압니다. 당신이나 나나 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의 말이 우습게 들립니다. 별거 아니어서 잘 하면 이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들이 집니다. 부인 말 안 듣는 남편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남편을 조종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의견을 부모님들이 따라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남편의 말은 언제나 옳고 또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아내의 의견이 틀렸다는 뜻도 압니다. 이는 마음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돕고 섬김의 자리에서 서 있는가? 아니면 조종하고 다스리는 자리에 서 있는가? 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서 개념이 없습니다. 자기 편리 한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22절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가까운 사이요, 편한 사이이지마는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넷째, 불순종하더라도 따로 처벌할 법이 없습니다.
부부지간에, 부자지간에 불순종했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벌을 내려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을 때, 여러 가지 형태로 징계하시고 또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셨고, 또 만나를 6일 동안만 내리시고 제7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서들이 불순종 할 때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흉년이 들게 한다든지 아니면 이웃 나라가 침범해 들어와 모든 진기한 보물을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뺏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아내나 자식이 불순종해도 징계를 내리거나 벌 할 수 없습니다. 벌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지켜지지 않고 질서가 무너져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잘 지켜지지 않아도 징계할 수 없는 법과 질서를 세워 놓으셨을까요? 이유는 아내와 남편이라는 질서는 사랑 안에서 지켜지는 것이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돕고 섬기는 가운데 세워져야 하고, 특별히 가정은, 아내와 남편의 바른 관계는 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이 사랑 안에서 지켜질 때 행복과 기쁨이라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이와 같은 질서를 정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잘 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문제 있는 부부를 보면 항상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문제있는 자녀들도 항상 부모에게 원망이 많습니다. 반면 행복한 부부를 보면 항상 자기는 잘 못하는데 좋은 아내 때문에, 좋은 남편 때문이라고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또 훌륭한 자녀들은 부모님의 은혜라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남편들보다 아내들은 이상하리만치 기억력이 좋습니다. 특별히 부인들이 잘 기억하는 것은 시집와서 고생한 것, 속상하고 억울한 것,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로 받은 상처나 아픔 그리고 자기가 남편이나 시댁식구들에게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잘한 것과 남편이 잘 못한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항상 아내는 억울하고 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너무 잘하고 고생하고 힘들었는데, 남편은 아내의 ‘수고와 고생을 몰라준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복종하거나 순종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한 살이 더 먹어 갈수록 남편들은 아내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농담 삼아 하는 말이‘40대 남편은 부인이 곰국을 끓이는 것이 무섭고, 50대 남편은 이사 갈 때 꼭 이삿짐 트럭 앞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60대 남편은 여행을 가면 부인의 손 을 꼭 잡고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성도 여러분! 그리고 자녀 된 여러분1 여러분만이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의 부모님과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결론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하듯이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 순종과 복종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가 좋은 관계, 부모와 자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화목한 가정, 복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에서도 은혜와 복을 누리고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있는데, 그것은 마25:31-33의 말씀입니다.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렇다면 오른편에 속한 자와 왼편에 속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다. 먼저 오른편에 속한 자들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마25:34-40에 보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왼편에 속한 자들에게는 이렇게 다음과 같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1-45)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은 마7:21-23에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렇다면 오른편과 왼편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불신자들과 연약한 이웃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참 성도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이와같이 가족을, 불신 영혼을, 연약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⑸ 장자는 기도의 용사다.


⑸ 장자는 기도의 용사다.

어느 단체이건 문제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장자가 있는 조직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기회로 선용한다. 그러나 장자가 없는 조직은 해결도 못하면서 말만 많고, 그러다가 결국 작은 문제도 크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적다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가르치려고 하고, 시끄럽게 떠드나 아비는 그것을 몸으로 안아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다. 마치 강제구 소령이 훈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이 온 몸으로 감싸고 산화한 것과 같은 원리다. 교회도, 가정도, 국가도 이런 장자가 필요하다. 특히 믿음 안에서의 장자는 문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힘을 잃어가도 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장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성에 의인 50, 45, 40, 30, 20, 10인을 위해서라도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피를 토하는 기도를 드렸다. 결국 그 성에 의인 10인 없어 멸망하긴 했어도, 아브라함의 erl도를 통해 조카 롯과 그의 딸들은 구원을 받았다.(창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 우상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고 여기며 그앞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백성을 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하자,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32:32)라고 담대히 기도하여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였다.

그래서 혼란한 사사시대를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다. 나라의 모든 일을 사울에게 맡기고 고향 라마 나욧으로 돌아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했다.(삼상12:23) 한편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사자굴속에 들어 갈 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였고, 두루마리 책을 통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의 기한이 이르렀음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 받아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금식하며 주여! 주여! 주여! 크게 외치며 기도했다.(“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9:3,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단9:19) 한편 포로시대에 포로민의 자녀로 태어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왕으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지명 받아 직접 성벽을 재건하는 은혜를 누렸다.

특별히 우리의 영원한 장자 되시는 예수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시고, 철야하며 기도하시고,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무릅쓰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처럼, 장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다. 이런 장자가 있는 교회가 곧 장자 교회다. 기도함으로 장자가 되고 기도하는 장자교회가 되라.

⑷ 장자는 말이 예쁘다.


⑷ 장자는 말이 예쁘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불신자들이 다른 점을 가장 쉽게 구별하려면 먼저 말을 들어보면 된다. 그 한 가지 예로 예수님의 평상시 언행과 바리새인들의 말을 비교해 보면 금방 차이가 난다. 하루는 제자들이 나면서 소경이 된 사람을 보고 물었다.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 이에 반하여 바리새인들은 항상 정죄하고, 시비 걸고, 말을 만들어 흉보는 일을 즐겨했다. 바리새인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말만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와 같아 독을 가진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14:28-29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말이 씨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말이 장자다워야 한다. 왜냐면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마12:37에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했고, 잠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했다. 또 잠18:20-21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강조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장자를 꼽으라면 단연 요셉일 것이다. 그는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으나 장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잠사 살펴보면, ⑴ 꿈을 이야기 했다. (창37:6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고백했다. (창39:9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 ⑶ 불평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⑷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렸다. (창41:16 -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⑸ 심지어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로 일관했다. (창45:5-8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50:20-21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과연 요셉의 말은 장자답다.

말과 입의 위험성과 중요성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가리지 않고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 고 했고, 심지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이 예뻐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한입으로 찬송하고 한 입으로 저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약3:8-11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러므로 장자는 말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자다운 말을 하는 사람만이 장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하기 전에 먼저 엡4:29의 말씀을 떠 올린 후 입을 열어 말할 때 언행에 성공하는 자가 것이고 장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⑶ 장자는 꿈이 크다. 비전(VISION)이 확실하다.


⑶ 장자는 꿈이 크다. 비전(VISION)이 확실하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이 비전(VISION)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의 정의는 생각하는 측면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비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이 나의 꿈과 나의 소망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는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이 계획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이뤄 가신다. 그러나 이무나 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지 않고 오직 비전을 가진 자 즉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이뤄지기를 바라며 이일을 최 우선순위에 둔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

성경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전10;31)는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은 다 이 비전에 주안점을 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전이 잇는 사람을 이 비전을 사명으로 여기며 산다. 비전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명으로 여기지 않는 다면 이것은 비전이 아니다. 사명은 목숨 걸고 이루어 내야 하는 꿈, 먹는 이유, 잠자는 이유, 공부하는 이유, 돈 버는 이유가 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선용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곧 비전의 사람이다.

이 비전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고, 사람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경우도 있으며,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허락해 주신다. 그러므로 비전을 받고, 비전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온유한 교회! 중미 선교의 허브가 되고 복음으로 세계를 먹이는 교회! 괴로움과 방황, 가난과 질병 부모 잃고 못 배워 눈물 흘리는 이웃과 형제의 필요를 채워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교회! 인재 양성을 통해 더 복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 이다. 이를 위한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겠다.

성경에 보니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말씀을 통해 홍수에 대한 경고를 듣고 평생을 방주는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나아갔고, 야곱은 장자의 비전을 어머니를 통해서 듣고 평생을 걸고 장자의 명분을 얻고 이를 유지하는데 헌신했다. 요셉은 두 번의 꿈을 통해 장자의 비전을 가지고 이 비전이 이루어 질 때 까지 종으로, 죄수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했다. 그래서 시105:17-19에서는 “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는 인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1793년 영국을 떠난 이래 아내와 자녀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평생 인도에 살며 인도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도록 헌신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얀마 선교의 비점을 가지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죽는 순간까지 순회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다. 죠지뮬러는 고아의 아버지로 평생을 살았으며, 방지일목사님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 선교사가 되어 헌신했다. 몇 년 전 소천하신 한국유리 회장 최태섭장로는 기독교 윤리에 입각한 회사 운영을 비전삼고 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가지고 비전을 이루며 멋있게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비전을 받는 것과 비전을 소유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비전을 이루는 과정은 많은 땀과 눈물,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는 비전 즉 땅 끝까지 복음 증거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고, 모세는 출애굽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평생 광야에서 살았다. 이 세상은 세상 풍조에 밀려 사는 군중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가진 소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비저너리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된다. 장자가 되라! 비저너리가 되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⑴ 야곱의 간증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⑴ 야곱의 간증
본문/창28:10-22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너무 귀하고 좋아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 했든지, 사람들은 이 젊은이를 송전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성은 송씨였지만, 이름은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도 많이 하므로 전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송전도' 인데 우리나라의 유명하신 최권능 목사님과 같은 경우입니다. 최 목사님의 본명은 최봉석이었지만, 하도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여서 별명이 '권능' 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보다도 별명인 '최권능' 으로 더욱더 유명해 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기도 이 송 전도라는 사람은 4남매를 남기고 젊었을 때 죽었습니다. 자녀가 4명이나 되는데, 남편이 전도만 하다가 죽었으니 그의 부인은 참으로 딱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부인도 어렵고 힘든 일을 다 하면서도 이 4남매를 믿음으로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 가난한 중에서도 십일조를 꼬바꼬박 드리며 아이들에게 십일조 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또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기도 시간을 빼놓는 일이 없습니다. 주일날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4남매를 꼭 데리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수주일을 했습니다. 4남매 모두 이렇게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그대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4남매가 자라서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4남매 중, 아들 이름은 송자문인데, 이 사람은 남경 정부가 들어설 때 재정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딸은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손 문 선생의 아내요, 둘째는 장개석 총통의 아내인 송미령이고, 셋째는 수석 국무위원인 공상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낳고 충성이 충성을 낳는 것처럼 이 4남매는 이렇게 하나같이 잘 되었습니다. 믿는 대로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 송 전도는 믿음의 본을 보였던 아버지였고, 그의 아내는 믿음으로 자녀를 키웠고 그 결과 말씀대로 자손이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바른 믿음 생활을 통해 은혜와 복을 누렸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므로 그분을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어떤 은혜와 가 풍성한 복을 누렸는가를 알려주는 간증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그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났을 때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난 장소에 특별한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은 벧엘이라 바꿔 불렀고, 두 번째 큰 은혜를 받은 장소의 원래 이름은 길르앗이었으나, 마하나임으로 바꿔 씁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은 본래 이름은 얍복 나루였으나 야곱은 브니엘이라 바꾸었습니다. 이 모두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큰 은혜를 받은 간증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잇는것은 우리 또한 이런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1. 루스에서 벧엘로
루스의 뜻은 ‘편도나무’라는 뜻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문16-19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모태신앙으로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들로부터 듣고, 부모님과 함께 예배도 드렸지만, 막연하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모를 떠나 먼 길을 가다가 들판에 누워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모님이 살고있는 헤브론에만 계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⑴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의 편재성)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육을 가진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어디에서 동시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 선원들도, 깊은 굴속에 잇는 광부들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나 대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것도 숨길수가 없고,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성경은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시11;13)

⑵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두 배에 가득 찰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 난 후 베드로의 첫 번째 고백은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이었습니다. 오늘 야곱도 하나님을 만난 후 첫 마디가 “두렵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의인인체 하고, 의롭다고 자처하고, 죄를 지은 후에도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심판대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나면 큰일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면 심판대 앞에서 만났을 때 격려와 위로를 받게 됩니다.

⑶ 비전과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본문13-15절에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살아남기 위해 단순히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야곱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도망지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연단의 길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비전, 즉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고난은 있겠지마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반드시 사명을 완수 할 수 잇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 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⑷ 예배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의 지도에 따라 억지로, 마지못해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억지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물론이요,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예배를 소홀히 하고, 예배의 태도가 불성실하고, 헌금 드리는 것이 불편해 합니다. 예배를 형식적으로, 하나의 순서로 의미 없이 드립니다. 큰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경배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바쳐 경배 드립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진 것이라고는 기름병이 전부였기에 그것을 베개하였던 돌 위에 붓고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난 간증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햇습니다. 여러분들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길르앗에서 마하나임으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신감을 가지고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에 도착한 야곱은 그곳에서 20년을 삼촌에게 고용되어 일꾼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촌은 야곱보다 한 술 더 뜨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야곱과의 약속을 10번이나 바꾸었습니다. 14년은 두 아내를 얻는데 보냈기 때문에 품삯을 받고 일한 것은 6년입니다. 그러니까 삼촌은 야곱과의 약속을 1년에 두 번씩 바꾼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교묘하고 야비한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하여 지켜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창31: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삼촌이 야비하게 야곱의 정당한 품삯을 빼앗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도와주셔서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창31:8-9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20년이 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얻은 아내들과 아들 딸 그리고 종들과 짐승들을 모두 이끌고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삼촌이 이것을 기회삼아 야곱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야곱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삼촌 라반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에게 손을 대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아침에 야곱을 만나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창31:29)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일로 라반은 야곱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돌아갔습니다. 그 때 까지도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기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마치고 길을 가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인 천사들이 자기와 가족들 그리고 모든 짐승의 떼를 호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를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십니다. 야곱은 잘 몰랐지만, 지난 20년 동안 야곱이 건강하고 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의 교통사고 때 천사가 보호했습니다. 2주 전 월요일 밤에도 천사가 저를 인도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작은 사업 중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고 간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신에 감사드리며 간증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얍복에서 벧엘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합니다. 열심히 삽니다. 밤 낮 가리지 않고 일합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38-40) 그러다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편하게 먹고 쉬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또 사명을 감당하라고 물질도 건강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망각합니다. 이럴 때 시험이 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삼촌 라반과도 화해를 한 후 즐거운 마음으로 20년 동안 모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금의환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다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어떻게 이룬 가문인데, 방법이 없습니다. 뇌물로 형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잇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형을 피해 멀리 도망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말 타고 쫓아오는 형에게서 어린 자식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도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와 밤새도록 씨름 했습니다. 한번만 도와주시라고, 한번 만 더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달랐습니다. 제발 이제는 육신이나, 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이 억매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과 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번만 해결해 주시면 믿음대로 살겠다고, 자꾸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환도 뼈를 부러뜨렸습니다. 더 이상 육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는 뜻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육신적인 야곱에서 영적인 이스라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살던 야곱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스라엘로 변화되라는 뜻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잘되는 것만을 목표로 살던 야곱이 이 땅에서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잘 사는 이스라엘,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을 우해 사는 야곱이 이웃과 불신 영혼을 위해 선교하고 전도하며 사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씨름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옛 사람과의 씨름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먹을까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 했다면 앞으로는 맡은 바 사명 감당을 위해 씨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나만을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이기고 이웃과 형제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총 동원하여 잘 받들고 섬기는 성도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부자가 되고, 자녀가 잘 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받은 복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며 충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간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비전을 위해 사는 성도, 육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영을 위해 사는 성도,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불쌍한 이웃을 섬기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꿈꾸며, 이렇게 살고 있다고 간증해야 합니다. 야곱의 삶을 청산하고 이스라엘로 살고 있다고 간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7년 5월 3일 목요일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자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자
본문/마1:18-23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땐, 단체 영화 관람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주로 겨울방학을 하는 날 학교에서 일찍 마치고 단체로 극장에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때 보았던 영화중에 하나가 바로 『콰이강의 다리』였습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중에 일본군이 태국의 콰이강 위에 철교를 놓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 다리를 놓고 있는 인부들은 연합군 포로들, 일본군이 붙잡아 온 포로병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일본군이 이 다리 공사에 중요한 장비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장교는 분명히 “연합군 포로병들이 이 다리가 놓아지면 일본군에게는 유리해 지는 반면 연합군에게는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예상한 포로들이 아마 어디 훔쳐서 숨기든지, 버렸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전부 포로병들을 불러놓고 협박을 합니다. “이것을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다 쏴 죽여 버린다!”고. 파리 목숨 같은 이 포로 병사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그 장비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영국군 포로병 한 사람이 나와서 내가 그랬다고 자백을 합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즉시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우연히 이 장비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내가 아니면 다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그랬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희생당한 것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요, 그 뜻을 바로 이해할 때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사 임마누엘 되심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채 죽음으로 가면서도 죽음의 길인 줄 모르는 인간들을 구원하사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요3:16)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그가 사람 되심은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온 인류의 죄인이라고 내가 나쁘다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이 돌아가시려고 제물이 되시려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가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셔서 앞에 걸어 나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 가장 큰 은혜와 복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 심지어 성도들도 임마누엘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인지 구약 성경을 통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떨면서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18:27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섰을 때 “티끌”과 같을 뿐임을 고백했습니다. 욥도 “그러므로 내가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목격하고는 자기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말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합 3:16)라고 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절)고 주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고기가 아주 많아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눅5:8)

임마누엘 -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자기의 생명을 취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대로 우리를 대면하시게 되면 우리 모두는 죽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거역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만 금하셨는데,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어기면 그들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역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당장 죽이시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죄를 범한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을 보이셨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사실이 우리가 생활 중에 범죄하고서도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거나, 또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남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중의 죄에 대해 의분으로 처결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법대로 우리를 처리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하실 충분한 권한과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바르기 때문이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너무 젖어 있어서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처결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여길 정도로 깊은 착각과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세상 살아갈 때에 문제가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져도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라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 - 자비의 하나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에게「대머리여! 대머리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곰을 두 마리씩이나 보내 그 아이들 42명을 모두 찢어 죽이도록 하신다는 말인가?(왕하2:23-24) 또 나답과 아비후가 술이 좀 취해서 성전의 향로를 들고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녔다고 해서 임직식 바로 그 날에 그들을 죽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레10:1-2),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는 언약궤를 붙들려고 손을 좀 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신다는 말인가?(삼하6:6-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약간 교만했다고 52년간 충직했던 왕에게 문둥병을 내리신다는 말인가?(왕하15:1-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벌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넘기시는가?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는가?(행5:1-10),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드리겠다고 말한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하고도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간음하였는데 왜 그 사람만 죽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간음을 행한 모든 사람들이 죽이시지 않고 살려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행하신다면 저와 여러분 중 사지백체를 정상적으로 소유 하고 계실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워 주고, 또 죄에 대한 심판을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한 예증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고전10:5-12).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하나님에서 거룩치 못한 것들에 대해 거룩한 방식인 공의를 행하신 경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모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불공평하실 수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성이 그처럼 침해를 당하셨는데도 어떻게 그러한 자비를 보이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죄 된 생활 가운데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고전 11:27-32)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많이 범죄한 생활을 하면서 성찬에 참여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변하게 하셨는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비슷한 세상적 습관을 행하고 육체의 일을 그렇게도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는 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시지 않는가?”가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왜 하나님께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땅으로 입을 벌려 그들을 삼키게 하셨는가?”(민16:23-33)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역시 거역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땅 속으로 삼켜 버리지 않으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측면에서 사건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로 알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우심을 바로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 - 겸손히 회개하라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른 채 교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눅13:1-5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대가 성전에 들어와서 갈릴리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희생 제물의 피에다 그들이 죽인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또는 ”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도 똑바로 생활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임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제를 거꾸로 보았습니다. 나에게도 당연히 닥쳐야 할 문제를 지금까지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심으로 막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결코 이런 일들이 닥치면 안 되는 존재로 생각하고 혹시 나에게 또는 주변에 닥치면 왜 이런 일이 생겨야 되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12:28-29에서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요,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죽게 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를 보시면 분노하시고 불로서 태워버리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허물과 죄가 셀 수 없음만큼 많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 낮아지신 하나님
이 사실을 인정 할 때,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위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어야 할 존재가 죽지 않고 오히려 그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입게 됩니다.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이 곧 임마누엘입니다. 예컨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였습니다. 성막을 세웠는데 그 성막 위에 낮이면 구름 기둥이 섰고 밤이면 그것이 불기둥으로 변하여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발생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양식문제가 해결되었고, 물 문제도 해결되었고, 고기가 먹기 싶다고 했을 때에 그 문제도 해결되었고, 범죄한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일도 해결되었고, 외적이 침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외적도 물리칠 수가 있었고,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 할 때에 구름 기둥의 인도만 받으면 되었으니 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총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받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임마누엘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인이 싫어하고 사단과 함께 하는 자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은 임마누엘을 환영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임마누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약하고, 모르는 것이 많고, 감당할 힘도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풍족하시니 임마누엘이면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임마누엘이 되면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집안에는 어른이 계셔야 질서가 잡힙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사람답게 삽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 욕심대로만 살고 타락한 정욕대로만 살다가 결국에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을 의식하면서 살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게 되고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자로 서게 됩니다.

임마누엘 - 사람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친히 사람이 되시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심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과 더 친해지고 더 가까워지고, 아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마1:23)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힘 중에 가장 큰 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냐? 임마누엘입니다. 성탄절은 무엇 하는 날입니까? 임마누엘을 기억하고 임마누엘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탄절에 가장 중요한 이 임마누엘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도시에서 성탄절을 맞아 신청 앞에 세워놓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 모형 중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간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동방박사와 들에서 달려온 목자들의 모습까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포대기도 말구유도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트리도, 즐거운 음악도,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받게 되어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없는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33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임마누엘 - 내(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
예수의 승천 후에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곁에 게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우리의 몸을 당신의 집으로 여기시고 함께 하십니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니 힘을 얻고 놀라운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나가서 전도했더니 그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이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임마누엘이 현실로 나타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따라가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목회, 행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임마누엘하신 주님이 사실이라면 내 집에, 교회에, 내 직장에, 내 사업에 역사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면 됩니다. 초대교회가 왜 축복을 받았습니까? 마가 다락방에 모여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날로부터 움직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큰 축복이 임마누엘입니다. 다른 것 하지 말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은 골2:8-10절에 다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는 그것도 다 속이는 것입니다. 사64:4-6절에, 우리는 다 헌 누더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만나야 승리하고, 하나님의 축복 받아야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할렐루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본문/사43:1-21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대략 7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① 삼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43:7-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고전10:31-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골1:16-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②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도록 (사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③ 하나님과의 교제하며 살도록 (창1:27-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요15: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15:5-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일1:3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④주의 뜻대로 쓰시기 위해 (잠16:4-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⑤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엡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⑥모든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창1:26,28-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⑦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사65:18-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살전5:16-항상 기뻐하라.)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데 이사야 43장만큼 그 관계를 명확하고 상세하게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사43:1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짧은 구절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과 구속하심, 지명하여 불러주심, 하나님의 소유 삼으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사43:7에 보면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우리를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답게 기르시고 만드십니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가득 담긴 이 말씀이 선포 될 당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소망도 없이 자포자기, 즉 ‘될 되로 되라.’식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사43:22에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라고 했습니다. 또 23절에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싫어해서 하나님과 너무 멀리 떨어 져 있는 상태입니다. 근묵지흑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전에 제가 한번 남극과 북극에 항상 꽁꽁얼어 있는 이유가 저주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태양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무력에서 능력으로, 좌절에서 소망으로 변화됩니다. 모세가 능력 있게 살았던 이유도 하나님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4:8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백성이 찬양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려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지 왜 자꾸만 기도하라, 기도하라.’해서 괴롭게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잔소리로 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로 여겨지시고, ‘기도하라.’는 말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말로 들리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은혜를 계속 공급받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님을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귀찮게 여기고 괴롭게 여기는 배은망덕한 백성들을 버리실 만도 한데 하나님의 짝사랑은 계속되고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짝사랑의 강도는 한층 강해지고 있습니다. 본문 19-20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 일'이란, 전혀 새로운 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일'을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시는 일이 두 가지로 나오는 데 하나는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새 일을 예비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것이 보통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는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십니다.(렘33:2) 이 아버지는 바다에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홍해 바다와 애굽 군대에 포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뒤에는 애굽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막혀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야! 이거 다리를 놓아야 되겠다. 아니면 배를 구해야 되겠다. 아니면 헤엄쳐 건너가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안 되면 싸우다가 죽던지, 아니면 항복하던지, 인간의 생각은 고작 그런 정도의 생각밖에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출14:10-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절망적인 절규인 것입니다. 아무도 드넓은 바다에 넘실거리는 물이 좌우로 갈라져 벽이 되고 그 사이에 길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사55:8)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만 높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도 우리보다 월등히 높습니다. 하나님께는 막다른 골목에도 길이 있고, 동서남북이 막혀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 안에는 피할 길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길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드는 하나님 안에는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생각 할 수도, 상상 할 수도 없는 생각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에게 새 은혜, 새 일, 새 축복을 준비해 놓으시고 기다리십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예비하신 새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까? 모세는 앞뒤가 꽉 막힌 홍해 앞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모세가 어떻게 할 때 바다 길이 열렸습니까? 기도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렘33:3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시50:15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고, 시46:5은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바로와 애굽의 군대가 새벽에 모두 수장되었고, 철옹성 여리고도 새벽에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새벽에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새벽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새벽에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잘 들어 주십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의 또 다른 이름은 회막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텐트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20:2에서는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신다.”고 했고, 예수님은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막 11:17) 성전에서 새벽에 기도하면 사막에도 샘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기도하면 사막도 꽃동산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크고 비밀한 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소망의 씨를 심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기다리시고 게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새 일, 크고 비밀한 일을 우리를 위해 시작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면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약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히11:1)이므로
① 원하는 모습을 그리며 기도합니다.
마음속에 원하는 이미지를 그리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머리와 가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상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커다란 그릇을 마련한 사람에게만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우리 삶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단지 하나의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 말은 곧 “마음에 충분한 그릇을 준비해 놓았느냐? 성장을 믿느냐? 뛰어난 리더와 훌륭한 부모가 되리라 확신하느냐? 2007년에 네가 이루기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는 반문입니다. 의심의 토양 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과거야 어쨌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능히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② 하나님은 기대한 만큼의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대 수준을 높여 기도합니다. 우리 인생은 꿈보다는 '기대'를 따라갑니다. 기대한 만큼 이룹니다. 긍정적 생각을 품은 인생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은 꼬이게 마련입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영 퍼센트에 가깝습니다. 늘 똑같은 수준을 기대하는 사람은 항상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마 9:29)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기대한 만큼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새벽에 기도 할 때 소원은 이루집니다.
③ 크게 입술로 외치며 기도하라.
잠18:20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고 했고, 롬10:10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마12:37에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이 입과 말의 능력을 알기에 항상 우리의 입에 불평과 불만을 집어넣으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성도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정적인 말, 불평과 원망의 말, 불신앙의 말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마음에 기대하는 대로 말한 대로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항상 승리와 풍요로움, 축복과 희망을 생각하며 '믿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축복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싶은 유혹이 들어 올 때, 소망의 하나님께 함으로서 힘을 얻을 때 모든 어두움의 그늘은 사라지게 됩니다. 특별히 마귀는 기도를 방해합니다. 엉뚱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졸리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새 일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소원하십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출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 말씀과 같이 저와 여러분은 지난 한해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고, 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곳에 모여 부르짖어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갖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해 놓의셨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
본문 / 느1:1-11

선물은 어느 때,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첫째. 중요한 날이나 기념일(설과 추석, 성탄절 같은 명절 때와 돌 회갑 등 생일) 을 축하하기 위해, 둘째. 특별한 일을 축하 할 때(결혼, 이사, 승진, 문병, 입학과 졸업, 취업과 개업, 퇴직)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고받는 대상은 임금과 신하사이에,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부부, 상사와 부하, 직장 동료와 친구 간, 애인 사이 등 다양한 인간관계 사이에 주어지거나 교환됩니다.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선물은 가는 정 오는 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선물을 기대합니다. 받지 못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은근히 자신이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인 은혜는 차원이 다릅니다. 은혜는 조건 없이,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완전 공자입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받은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또 은혜를 베푸신 분께서 은혜 받는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주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핵폭탄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곳은 정글일 지라도 황무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사막도 옥토가 됩니다. 은혜가 제일입니다. . 은혜는 별미와 같습니다. 안 먹어 보고, 맛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맛을 모르게 때문에 눈앞에 있어도 먹어 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눈만 감아도 먹고 싶고(경북 포항의 과메기, 전라도 목포의 세발낙지와 홍어회, 강화도의 밴뎅이 회, 충남 서산의 간장 게장과 어리굴젓, 강원도의 막국수, 메밀묵 밥) 생각만 해도 입가에 침이 돕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받아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기를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느헤미야는 은혜를 받아 본 사람입니다. 은혜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맛을 알기에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11절에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민 2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 땅에서 강제로 바벨론에 끌려 온 포로였습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왕의 최 측근으로 등용 될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렇게 최 고위직에 오른 것이 자기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최 고위직에 오른 것이 깨달아 지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 할 길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처럼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과 하나님께서 택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소식에 궁금해 하던 차에 동생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즐거운 소식이 아니라 매우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B, C 538년(또는 537년)에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찌르고 메데와 파사 제국의 왕이 되자,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와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스1:2-4). 스룹바벨을 필두로 하여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비유태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마자 중단하게 되어 약 19년이 흐르게 됩니다. 19년 후인 B, C 519년 경 다리오 왕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하고(스6:1-5) 성전 건축 공사를 재개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스6:6-12). 그 결과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공사를 4년 만에 마치고 봉헌식(스6:13-18) 을 마쳤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백성들은 힘을 내어 성벽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이 죽고 아하수에로가 왕이 되자 대적들은 다시 왕에게 청원서를 냈고, 또 그 아들 아닥사스다가 왕이 되자 또 다시 청원서를 보내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지 못하도록 약 60년 정도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왕 7년에 왕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확인 할 수 없지만, 느헤미야가 청원한 것이 아닐까?) 왕은 제사장 에스라에게 2차 귀환을 명령하면서 더불어 행정관들과 재판관들을 정치와 종교의 전권을 장악하여 유대법과 페르시아법에 따라 재판하고 중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명하기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을 있는 네 하나님의…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유배시키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스 7:25, 26)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제2의 탄생을 가능케 해 준 조서였습니다. 유사와 재판관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특별히 지방 정부차원에서 옛 유대 율법의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수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의 매부이자 팔레스타인 총독이었던 메가비주스가 아닥사스다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기원 전 448년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같은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성문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이 반란 소식을 알고 있던 느헤미야는 마음이 불안 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 성은 안전 한 것일까? 그런데 동생 하나니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려한 대로 성문이 불타고 완성되지 못한 성벽은 다시 허물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분노했습니다. 수일동안 울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참된 성도는 언제나 은혜 아래 삽니다.
본문1절에 보니 느헤미야가 사는 곳이 “수산 궁”이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궁궐은 신앙을 유지하거나 키워나가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곳입니다. 궁중은 신앙생활에 도움받기 보다는 방해가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궁중의 호화스런 생활은 사치와 방탕으로 흐르기 쉽고 또 도덕이 문란해서 기준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궁중은 인간의 탁월함과 자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교만을 부추기고 특히 왕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왕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궁중에서의 높은 지위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때론 어리석은 일로 취급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수산 궁의 아닥사스다 왕은 불을 섬기는 배화교 온갖 우상을 섬기는 왕이었기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소수의 무리일 지라도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본문11절에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라는 말씀을 볼 때, 느헤미야가 함께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왕궁의 고위 관료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이곳 과테말라에 살고 잇는 것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느헤미야에게는 교회도 없고, 믿음의 식구들도 많지 않았지만, 소수의 무리가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2. 성도는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⑴ 현재 자신이 받은 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앞에 놓인 문제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는 간증을 듣거나 책을 보면 이러 저러한 문제와 소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 받았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복을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받은 복과 은혜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형제와 이웃을 더 행복하게 하는 일에 쓰고 싶은 소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범적인 신자들을 보면 복을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해” 주시자(삼하7:1)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2)라고 고백하며 은혜에 감사해서 성전을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이런 복된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다윗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 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라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도 포로민의 자녀로서 크게 성공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성공과 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구하는 것에나 생각하는 것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복된 생각으로 영광 돌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⑵ 나를 보내소서! - 쓰임받기를 소망 할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동생 하나니가 예루살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반란이 일어나 성문은 불타고 성벽을 다 허물어 졌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바사나라의 고관이 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쓰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항상 여러분들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고 들은 사람이 책임져라!’ 하나님은 우연히 보게 하시거나 듣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더도 하나님께서 왕후가 되게 하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한 날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머뭇거리자 삼촌 모르드게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맡기시려고,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현재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지위와 권력을 마음껏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벽과 성문의 역할은 그 어느 것 보다 요긴하고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① 성문과 성벽은 자주권의 상징입니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거하도록 예루살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22장) 그 모리아 산이 바로 미래의 예루살렘 성의 성터입니다. 이 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자신의 왕궁과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곳입니다.(대하3:1) 예루살렘은 희생 제사를 드리고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와 찬양이 계속 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자주국가로서,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리는 제사장적 권세를 발휘하는 복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것은 왕도 없고 주권도 없는 패망한 나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느2:17)고 했습니다.

② 안전보장의 상징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자 성안의 거민들에게는 안전 보장이 사라졌습니다. 언제 외부의 원수들의 공격을 당할지 무방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성벽은 백성들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벽과 성문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벽입니다. 성벽이 허물어져 있으면 항상 맹수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열리면 적은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벽이 없는 예루살렘에는 이방의 족속들이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추수해서 곡식을 곳간에 모아두면 이방족속들이 무너진 성벽으로 달려 들어와서 곡식을 가져가고 어린 아이와 여자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 마귀는 우리의 무너진 성벽과 성문이 어디인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건드리면 완전히 무너지는가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막아야 합니다. 재건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의 경계선
예루살렘 성벽의 또 다른 의미는 이방 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보호막이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보호가 무너지고 구별됨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성이 훼파되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사이에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안과 밖에 구별이 없어지니 육적인 것이 들어오고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와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안식일 날에 대한 구별도, 예배에 대한 신령함도,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 모습은 영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벽이 없으면 이방의 그릇된 사상과 우상의 죄악들이 여과 없이 침투되어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인 우리의 마음속의 성전이 완전 파괴되어 이방인과 동일한 사람들로 변하게 됩니다. 이는 성전에서 안전하게 예배드릴 수 없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진리와 말씀으로 든든히 성곽을 쌓지 않으면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훼파된 성벽, 교회의 적들은 바로 이곳을 통해 들어와서 피해를 입히고 성도들은 넘어뜨리고 그들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런 악한 일들은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데, 마음이 아픈 까닭은 이 악들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고 선량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문이 불에 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강도들에게 짓밟히고 이방 종교와 우상 숭배자들이 자유롭게 성을 드나들며 하나님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해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자신이 쓰임받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어떤 가슴 아픈 사건이 보이십니까? 어떤 종류의 슬픈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가슴 아프고 속상하고 슬픈 일을 해결하여 기쁘고 즐겁고 복되게 만드는 일에 나를 써 달라고 간청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⑶ 구체적 목적으로 확신에 찬 기도를 할 때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 5절에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부르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때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크고 위대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크신 분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영국의 윌리엄 케리는 세계선교의 창을 열기 위해서 배를 타고 인도의 바다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크고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시도하라.” 우리가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기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큰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둘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본문 6-8에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만일 너희가 범죄 하면 내가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로 널리 흩을 것이요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 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너희 중에서 하늘 맨 끝 지역에까지 쫓겨 난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데려오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30:3-4을 통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확신있는 기도는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죠지 뮬러 목사님은 시68:5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는 이 말씀 붙들고 수천의 고아를 먹였습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셋째, 긍휼을 베푸시는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입니다. 눅18:11-14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긍휼은 곧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금식기도는 지금까지는 육체의 힘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할 것을 믿는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사58:6-9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의 기도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확신이 있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자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지만, 지금 부터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이전 보다 더 큰 은혜를 내려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느헤미야와 같은 이런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시는 제일장로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6.법과 질서가 바로 선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6.법과 질서가 바로 선 교회)
본문 / 엡4:11-15

한 때 시계하면 스위스제품을 가장 손꼽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위스는 시계 산업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스위스가 이렇게 주도권을 잃게 된 이유는 시계에는 반드시 톱니바퀴, 태엽과 바늘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전자시계로 대체된 시계 시장은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전통과 기성에 안주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미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측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1981년 빌 게이츠는 “메모리 640KB이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용량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당시 빌 게이츠가 ‘호언’한 메모리의 100배가 넘는 용량을 사용 중입니다. ‘컴퓨터 황제’의 ‘무식한’ 발언에 놀랄 수도 있지만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빗나간 예견은 무수히 많습니다. 1950년께 맥아더 장군이 6ㆍ25로 폐허가 된 서울을 돌아보며 “이걸 복구하는데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했고, 의사 겸 코카콜라발명가인 존 펨퍼턴은 1888년 자신의 코카콜라 제조법을 워커 챈들러사에 팔며 “이건 단지 소화제일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931년 한 출판업자가 펄 벅의 <대지> 원고를 보고 “미국의 여론은 중국 냄새가 나는 것은 관심 갖지 않는다.” 고 거절했으나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1912년 E.J 스미스 선장이 타이태닉호의 출항을 앞두고 “타이태닉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하나님도 이 배는 침몰시킬 수 없다.” 고 호언했지만, 출항한 지 5일 만에 침몰되고 말았습니다. 1963년 한 미 과학처 관계자가 마우스 발명가인 더글러스 엔젤바트의 마우스에 대한 말을 들은 후 “무슨 소리인가. 그 누가 정보전달을 할 수 없는 마우스를 쓰겠는가. 여기에 투자하는 건 미친 짓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수억의 네티즌이 지금 이 순간도 마우스로 인터넷을 뒤지고 있습니다. 1946년 20세기 폭스사 회장이었던 대릴 자눅은 "텔레비전은 처음 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하루에 평균 2시간 이상씩 티브이 앞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주요 구성원인 여성들의 취업이 일반화되고, 자가용이 일상화되었으며 주 5일제 근무가 곧 실시되었습니다.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지는 환경의 변화는 교회의 체질 개선해야 하고 또 개혁을 요구당하고 있습니다. 옛 방식을 고집하면서 변화하기를 거절한다면 교회는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들 중에는 건강한 교회, 병든 교회, 죽은 교회가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건강한 교회는 자체적으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적응하고,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교회입니다. 병든 교회는 마치 환자가 의사의 손을 빌어 고침을 받아야 하듯이 타인에 의해 욕먹고 지적받는 등 남에 의하여 고쳐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아예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아예 고치지 못해 결국 도태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리를 고치거나 진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 영생에 관한 구원의 복음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 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꾸는 것은 진리를 담는 그릇 즉 패러다임입니다. 제도나 방법입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제도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입었던 옷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입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열 살 때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으려고 한다면 그 옷은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그것은 첫째, 생각의 틀입니다. 둘째, 방법 곧 수단의 틀입니다. 셋째, 제도 혹은 법의 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대와 상황에 맞는 바른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바꾼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기준 즉 성경에 근거한 변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질서를 세울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은혜와 복이 되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는 기준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어린아이 같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질서를 세웠고, 그 질서를 유지 할 직분 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욕심대로 행합니다. 자기 맘대로 안 되면 투정부리고, 울고, 항상 자기만 생각합니다. 생각이 행동이 유치합니다. 관심을 끌려고 하고, 사랑받기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 아빠의 관심을 끌기위해 오줌도 싸고, 엄마가 안 볼 때, 동생을 꼬집고 때립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둡니다. 어느 성도가 어린 아이 신앙인가, 성숙한 신앙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함으로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자기 고집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어린 아이 신앙이지만, 성숙한 신앙은 교회의 덕과 질서에 따르려고 힘쓰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어떻게 세울 수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배우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 중심이 되고, 주인으로 섬길 때 질서가 세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나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바른 성도, 바른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왕 중심으로 뭉칠 때 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어느 신하가 권력을 휘두르거나 실력자들끼리 권력 암투가 일어날 때 나라가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임에도 지도자들끼리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데서 교회가 시험이 들고 분열의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목사가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주장하고, 어느 교회는 어느 장로 혹은 안수집사가 자기들이 세운 교회라고 주장함으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든든히 서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몸 된 교회가 바르게 운영되도록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본문15절에서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직분자를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고 교회에 입교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기가 세상에 태어남 같이 영적으로 새 생명을 얻어 출생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성도는 누구나 영적 어린 아기로 출생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갑니다. 아기가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언제나 어린 아기일 수 없습니다. 언젠가 성장하여 스스로 일어서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건강한 몸으로 일하고 가정을 세워가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어른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기로 시작하였지만 언젠가 성장하여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연약한 자를 섬기고 봉사의 일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교회의 일군과 세상의 일군(직분)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직위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도 무거워지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기도 합니다. 진급할수록 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하급 직원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고 그것이 잘 시행되는가를 확인하는 책임과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부리는 최고 경영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사람의 위에서 사람을 부리고 명령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일에 남보다 앞장을 서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도하라’ 하고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라’ 하면서 나는 뒷짐을 지고 감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 섬기는 자리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때 중직은 남보다 더 중요한 직분이라기보다는 일반 성도들 앞에서 더욱 앞장을 서며 섬김과 경건한 삶의 본을 보이는 책임이 무거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회의 직분은 신분과 계급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는 것은 승진이 아니고 거룩한 책임의 증가입니다. 질서 있는 교회! 복된 교회는 직분 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 헌신하는 교회입니다.

2. 성경 말씀에 따라 교회를 운영할 때 질서가 세워집니다.
본문15절에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머리와 몸이 누가 더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머리가 없는 몸도 죽고 몸이 없는 머리도 죽습니다. 둘이 연합할 때 너도 나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가 몸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몸이 머리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기적 관계입니다. 서로 돕고 섬기는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사랑의 질서는 세상의 온갖 법을 능가합니다.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법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가정은 성문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엄연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엡5:23-25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자 아래 여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계급적인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역할이 다르다는 표현입니다. 신체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머리 역할을, 여자에게는 몸통 역할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부부는 상전과 종의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고 협력하는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교회도 온 성도가 서로 사랑으로 행할 때 좋은 교회 질서 있는 교회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저는 “금슬 좋기로 첫 손에 꼽히는 부부가 있다.” 기사를 보고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날개옷 대신 다리를 잃은 아름다운 선녀와 은도끼 금도끼 대신 한 팔을 잃은 듬직한 나무꾼, 현대판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은 충남 예산에 사는 임승복(61, 지체장애2급), 김예환(60, 지체장애2급)씨 부부가 그 주인공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남편과 임승복 씨는 7살 되던 해 나무에서 떨어져 왼팔을 잃었고 부인인 김예환 씨는 6살 때 골반 뼈를 다치면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 예환씨는 앉은 채로 시집와 앉은뱅이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비록 부인은 앉은뱅이 이지만, 남편의 한 쪽 팔을 대신해 주었고, 일어서지 못하는 아내를 도와 식사준비며 빨래를 해주며 40년 동안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중매로 만나 한눈에 반한 후 40년 동안 3명의 자녀를 낳고 행복한 황혼을 맞이한 이 부부, 36세, 32세의 두 딸은 모두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스물다섯 막내아들도 서울에서 착실히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서로의 손발이 되어 돕고 섬기는 삶,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피 즉 아카페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병든 교회요, 점점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요일4:8). 또한 사랑만이 가정과 사회에 평화와 행복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능력입니다(요일3:11-12). 가인이 자기 아우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형제의 질서가 파괴되었고 유다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스승과 제자의 질서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에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진리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도 형제도 사랑이 없으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뿐입니다(갈5:14-21). 좋은 교회는 목회자와 중직자,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목회자는 자동차로 비유 할 때, 운전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운전대를 맡긴 이상,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제가 운전하고 다닐 때 집사람하고 다니면 제일 편합니다. 사실 저는 딴 것은 몰라도 길은 잘 알지만, 집사람은 딴 것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길눈은 영 어둡습니다. 어느 때는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돌아서 가도 잘 가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만일 자동차가 운행 중에 사고 나면 제일먼저 다치고 죽는 사람이 운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운전수는 더 책임감을 느끼고 운전을 잘 하려고 노력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기에 목회 방법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목적지와 가는 길은 이미 성경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길로 가더라도 목회자에 때라 조금 씩 다릅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고 또 목사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더라도 담임목사의 목회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다면 목회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믿고 중직 자들과 온 교인들이 하나 되어 사랑으로 돕고 섬기며 목회자와 협력할 때에 교회는 질서가 잡히고 든든히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후임자를 구할 때에 조만식 장로님과 그 당회는 누구를 택한 줄 압니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는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일본 명치대학 출신이고 사회적인 신분도 사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 학생으로 제자였고 나이도 15세나 어렸습니다. 출신도 평안도가 아니고 경상도였습니다. 모든 면에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음에도 교회와 한국교계를 위해서 친히 마산까지 찾아가서 모셔왔으며 주 목사님이 순교당할 때까지 깍듯이 모셨던 것입니다. 과연 조만식 장로님은 큰 그릇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겸손한 조만식 장로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3. 덕을 세울 때 질서 있는 교회가 됩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하면 안 됩니다. 또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교회를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는 일도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몸이라는 기관들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이 연신 입에다 음식을 넣어줄 뿐, 자기는 아무 것도 취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많은 힘을 가져다줍니다. 눈은 무엇을 살피고 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봅니다. 다리는 걸어가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걸어갑니다. 그런데 눈이 피곤하다고 해서 걸어가면서 눈을 감는다면 온 몸이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입이 먹기 싫다고 벌리지 않는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의 원리는 곧 교회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전부 내게 유익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신앙인이 나보다 다른 형제자매를 먼저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각자 신앙생활에 힘쓴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살므로 교회는 정말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덕이란 소극적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10:32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전8:1에서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8:1) 그렇습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덕이 없으면 성경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타인을 판단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함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다툼과 싸움을 조장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주장만 옳다고 내 세우면 그것이 틀리지 않았더라도 덕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옳은 주장일지라도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떠나게 한다면 그 주장은 결코 하나님 앞에 칭찬들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적극적 측면에서의 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덕이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되도록 생활을 이끌어 가는 모든 것이란 말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겠지만, 그 외의 것은 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만 하면 그것이 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지는 것이 덕입니다. 양보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양보가 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23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덕을 세우는 길은 곧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도 이것이 남에게 유익이 될까? 생각해 보고 말하고, 행동도 이것이 남에게 유익이 될까? 생각해 보고 그렇게 행하면 그것이 덕을 쌓아 나가는 방법입니다. 덕이 세워지고 덕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요 질서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4.믿음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4.믿음으로 충만한 교회)
본문/히11:6-7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고, 바로 그 다음절인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함으로서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엡2:8-9절에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종교도 민족도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에게 어느 날,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노아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으므로,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에게는 범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형성하거나 상념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무엇과 같을까?」해서 그 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에 대한 개념이 온전히 정립되지 않았는데,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생 전체를 걸고, 무려 120년이나 넘게 불모의 땅에서 방주를 지어 나갔던 것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행동했던 유일한 이유는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보지 못하는 일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다는 말씀은 노아와 하나님 사이에 약간의 갈등 즉 노아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기억 할 때, 노아는 물을 보지 못했고, 또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고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하나님께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이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너를 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고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함을 뜻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협박당해서 하는 수 없이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하다”(fear)는 헬라어(eulabeomai)로는 ”존경하다”를 뜻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행했던 것입니다. “경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경건한 조심성 즉 큰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방주를 예비했던 것입니다.

2. 믿음은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찌나 잘 믿었던지 그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밖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든 것을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노아에게 “노아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한다. 너는 반드시 방주를 지어야 한다. 이것이 네가 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노아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백년 이상을 방주를 짓는 데에 보냈습니다. 그것도 바다와는 너무나 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한 장소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1-2년이 못되어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사는데, 해야 할 일이 많고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처럼 노아도 분명 나름대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를 짓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위대한 헌신인 것입니다. 사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있던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배에 관하여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 그것에 자신의 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3. 믿음은 도전입니다.
⑴ 선례가 없기에 도전이다.
창6:14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선례(先例)가 없는 믿음에의 도전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광야 한가운데에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하신 방주에는 참으로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의 한 가지 예는 ”역청”이라는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역청(Pi-tch)은 속죄(Atonement)와 같은 단어입니다. 레1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좀 쉽게 풀어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나는 이 피를 너의 영혼을 위해 단 위에 바르도록(pitch) 너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영혼을 위한 역청(pitch)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역청이 밖의 물 심판을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역청은 우리를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방주에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홍수로부터 신자를 감쌌으므로 결코 신자를 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오늘날 교회를 방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⑵ 규모와 크기가 매우 도전적이다.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청사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長)이 삼백 규빗 광(廣)이 오십 규빗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한 규빗(cubit)이 얼마만한 길이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그 길이가 44-56cm가 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방주가 길이 132m, 폭이 22m, 그리고 높이가 13m(약 4층 건물의 높이)의 크기가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방주는 3개의 갑판 (3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갑판의 총 넓이는 대략 8,891평방미터(야구장 20개의 넓이보다도 넓다.)이며, 방주의 총 부피는 40,917입방미터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배인가!를 상상 할 수 있겠습니까?

⑶ 믿을 수 없는 말을 믿는 것이 도전이다.
창6:17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비가 내릴 것이며 당신께서 땅에 홍수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창2: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땅은 땅 밑에서 올라오는 안개로 적셔졌습니다. 그리고 안개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감싸져 있었을 것입니다(창1:6-7). 땅을 뒤덮고 있었던 이러한 안개는 홍수전에 사람들이 장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즉, 태양의 방사선은 결코 그 안개를 통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양의 방사선으로 말미암는 폐해에 노출되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900년 이상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자(창7:11) 땅의 전체 대기는 변화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태양의 방사선에 노출됨에 따라 짧아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을 살펴보면, ① 이전에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대홍수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② 심판은 120년이란 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③ 노아가 그 멧세지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아는 자기 이웃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④ 노아가 가졌었을 한 가지 분명한 의혹은 ”만일 홍수가 닥쳐온다고 할 때, 저렇게 거대하고 더구나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두 마리씩이나 싣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⑤ 그 방주는 닻도 돛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으며, 더구나 노아는 항해 방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4. 믿음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디게 천천히 임합니다. 창5: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므두셀라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네가 너의 자녀를 보느냐?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에야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내어 집니까?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대홍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3:20에서는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 외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선 므두셀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심판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얼마 동안이나 향수했습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긴 969년을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너무도 긍휼이 많으셔서 거의 1,0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 질 때 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일 즉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전도자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⑴ 전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노아는 전도자였습니다.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전했고, 그가 무엇을 설교했습니까? 벧후2:4-5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의 전도, 그의 설교는 일백 이십 년 동안 배를 짓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설교였습니다. 그가 방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가 등에 판자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설교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삶으로 전도했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그가 전도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노아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시대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⑵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양육하며 기다렸습니다.
창6:1-2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풍습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당시의 세상풍속을 쫒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으로 가정을 지켰습니다. 한 아내를 두고 세 아들에게도 오직 한 아내만을 두어 가정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벧후2:5에서 노아의 식구를 일곱 명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나중에 노아의 아내가 죽었으나, 노아는 후처를 취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이어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가문을 통하여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계대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자녀들에게 바른 믿음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6:3-9을 통해 이스라엘 백서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일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믿음을 자녀들에게 확실하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명령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자녀들의 교육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물려받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 자녀들이 믿지 않는 다면 교회는 100년 못되어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100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학교를 세워 기독교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섰지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안창호, 김규식등 이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기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기관 심지어 정부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시간과 물질 그리고 정성을 투자합니다.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신앙을 제일, 최우선 할 것입니다. 말은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참 말이 아닙니다. 노아는 믿었고, 말했고,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방주를 지으며 전도를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며 믿음 안에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군대 훈련을 통한 겸손 훈련

군대 훈련을 통한 겸손 훈련
민10:11-36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
창15:12-17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는 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땅을 청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하나님의 군대의 사명이다.
레18:21-25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 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신18: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손 70명을 애굽으로 내려 보내 연단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해 불러 내셨다. 그래서 이들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다.

출애굽기 6:26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출애굽기 7:4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출애굽기 12: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찌니라.”
출애굽기 12:41“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51“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민수기 1:3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3. 그러나 이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출애굽기 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출17:8-16) - 100% 하나님의 은혜
4. 군대의 조직 (민10:11-36)
5. 40년 동안의 행진과 행군을 통해 군대가 됨(민33:1- )
6. 전쟁을 통해 승리를 경험 함
⑴ 가나안을 이김(민21:1-3)
⑵ 시혼과 옥을 이김(민21:21-26)
7.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고 완전한 군대 조직을 가추고 가나안에 입성 준비를 완료함
⑴ 라합의 고백(수8-11)
⑵ 전쟁 준비 완료(수3:1-3) “진중에 두루 다니며...
⑶ 여리고 함락(수6:1-3) “너희 모든 군사들은...

에수님께 배우는 겸손

예수님께 배우는 겸손
1. 최고의 겸손은? - 세상의 모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말씀대로 되는 줄을 믿고, 인정하고 순종하는 상태.
2. 이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마라의 쓴 물과 만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심.(신8:3-6)
3. 예수님이 겸손하신 이유는? -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히10:6-10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100%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⑴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성경의 평가 -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히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⑵ 예수님의 순종의 실제 -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요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⑶ 순종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부탁), 명령 -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2. 사도들의 사역
⑴ 바울의 사역 - 롬1:5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⑵ 베드로 - 벧전1:14-15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⑶ 요한 - 요일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3. 믿음의 조상들의 순종
⑴ 노아 -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창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⑵ 아브라함 -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 창22:16-18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26:3-5)
4.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⑴ 하나님의 명령 -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⑵ 순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 - 출 39, 4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