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일 목요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4.믿음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4.믿음으로 충만한 교회)
본문/히11:6-7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고, 바로 그 다음절인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함으로서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엡2:8-9절에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종교도 민족도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노아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에게 어느 날, “노아야, 비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노아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으므로,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에게는 범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아는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말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한 어떠한 개념을 형성하거나 상념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가 무엇과 같을까?」해서 그 비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에 대한 개념이 온전히 정립되지 않았는데, 「비가 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의 인생 전체를 걸고, 무려 120년이나 넘게 불모의 땅에서 방주를 지어 나갔던 것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행동했던 유일한 이유는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1,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보지 못하는 일에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아”다는 말씀은 노아와 하나님 사이에 약간의 갈등 즉 노아의 믿음에 대한 시험(test)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기억 할 때, 노아는 물을 보지 못했고, 또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고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하나님께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이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너를 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고는 하나님의 말씀의 엄중함을 뜻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협박당해서 하는 수 없이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하다”(fear)는 헬라어(eulabeomai)로는 ”존경하다”를 뜻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경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신 바를 행했던 것입니다. “경외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경건한 조심성 즉 큰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방주를 예비했던 것입니다.

2. 믿음은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어찌나 잘 믿었던지 그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가 밖에서 방주를 짓고 있을 때 그의 이웃들이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모든 것을 눈에 선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노아에게 “노아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한다. 너는 반드시 방주를 지어야 한다. 이것이 네가 할 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노아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백년 이상을 방주를 짓는 데에 보냈습니다. 그것도 바다와는 너무나 먼,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의 어느 한 장소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1-2년이 못되어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행동으로 응답하는 믿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순종하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사는데, 해야 할 일이 많고 또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처럼 노아도 분명 나름대로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를 짓기 위해 그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것은 위대한 헌신인 것입니다. 사실 그는 바다로 나가는 배들이 있던 지역에 살고 있지 않았으므로 배에 관하여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듣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순종하여 그것에 자신의 생을 바쳤던 것입니다.

3. 믿음은 도전입니다.
⑴ 선례가 없기에 도전이다.
창6:14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선례(先例)가 없는 믿음에의 도전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광야 한가운데에 거대한 배를 지으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하신 방주에는 참으로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의 한 가지 예는 ”역청”이라는 단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역청(Pi-tch)은 속죄(Atonement)와 같은 단어입니다. 레1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는 말씀을 좀 쉽게 풀어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 나는 이 피를 너의 영혼을 위해 단 위에 바르도록(pitch) 너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영혼을 위한 역청(pitch)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은 피이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안전했습니다. 왜냐하면 역청이 밖의 물 심판을 막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역청은 우리를 모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방주에는 역청으로 말미암아 물이 새는 곳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피가 심판의 홍수로부터 신자를 감쌌으므로 결코 신자를 해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오늘날 교회를 방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⑵ 규모와 크기가 매우 도전적이다.
방주에 대한 하나님의 상세한 청사진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長)이 삼백 규빗 광(廣)이 오십 규빗 고(高)가 삼십 규빗이며” 한 규빗(cubit)이 얼마만한 길이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그 길이가 44-56cm가 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장 짧은 것을 취한다면, 우리는 방주가 길이 132m, 폭이 22m, 그리고 높이가 13m(약 4층 건물의 높이)의 크기가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방주는 3개의 갑판 (3층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갑판의 총 넓이는 대략 8,891평방미터(야구장 20개의 넓이보다도 넓다.)이며, 방주의 총 부피는 40,917입방미터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거대한 배인가!를 상상 할 수 있겠습니까?

⑶ 믿을 수 없는 말을 믿는 것이 도전이다.
창6:17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비가 내릴 것이며 당신께서 땅에 홍수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땅에 비가 내린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에, 노아는 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창2:6절에 의하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땅은 땅 밑에서 올라오는 안개로 적셔졌습니다. 그리고 안개로 말미암아 땅 전체가 감싸져 있었을 것입니다(창1:6-7). 땅을 뒤덮고 있었던 이러한 안개는 홍수전에 사람들이 장수했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즉, 태양의 방사선은 결코 그 안개를 통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태양의 방사선으로 말미암는 폐해에 노출되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900년 이상을 향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자(창7:11) 땅의 전체 대기는 변화되었고 인간의 생명은 태양의 방사선에 노출됨에 따라 짧아지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신 내용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많은 이유들을 살펴보면, ① 이전에 비가 내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대홍수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② 심판은 120년이란 먼 훗날의 일이었습니다. ③ 노아가 그 멧세지를 전했을 때 아무도 그의 멧세지를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아는 자기 이웃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④ 노아가 가졌었을 한 가지 분명한 의혹은 ”만일 홍수가 닥쳐온다고 할 때, 저렇게 거대하고 더구나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두 마리씩이나 싣고 있는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⑤ 그 방주는 닻도 돛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으며, 더구나 노아는 항해 방법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4. 믿음은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디게 천천히 임합니다. 창5:21절에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므두셀라의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보내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네가 너의 자녀를 보느냐? 그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가 죽을 때에야 그것을 보낼 것이다”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보내어 집니까?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대홍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3:20에서는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 외에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선 므두셀라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므두셀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심판을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는 얼마 동안이나 향수했습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보다도 긴 969년을 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너무도 긍휼이 많으셔서 거의 1,000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던 것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뤄 질 때 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일 즉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을 알리는 전도자로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⑴ 전도하며 기다렸습니다.
노아는 전도자였습니다.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전했고, 그가 무엇을 설교했습니까? 벧후2:4-5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그의 전도, 그의 설교는 일백 이십 년 동안 배를 짓는 것, 바로 이것이 그의 설교였습니다. 그가 방주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가 나무를 쓰러뜨리는 소리를 듣거나, 혹은 그가 등에 판자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그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라는 설교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삶으로 전도했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그가 전도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노아는 낙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믿음으로 자기 시대를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⑵ 믿음으로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양육하며 기다렸습니다.
창6:1-2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풍습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당시의 세상풍속을 쫒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고 믿음으로 가정을 지켰습니다. 한 아내를 두고 세 아들에게도 오직 한 아내만을 두어 가정의 순결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벧후2:5에서 노아의 식구를 일곱 명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나중에 노아의 아내가 죽었으나, 노아는 후처를 취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이어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가문을 통하여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계대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일은 자녀들에게 바른 믿음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6:3-9을 통해 이스라엘 백서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 일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믿음을 자녀들에게 확실하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명령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자녀들의 교육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물려받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자녀 교육에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어도 우리 자녀들이 믿지 않는 다면 교회는 100년 못되어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100년 전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학교를 세워 기독교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섰지만,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안창호, 김규식등 이 모든 사람들은 성경을 기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이나 기관 심지어 정부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일에 시간과 물질 그리고 정성을 투자합니다. 신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신앙을 제일, 최우선 할 것입니다. 말은 신앙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말은 참 말이 아닙니다. 노아는 믿었고, 말했고,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방주를 지으며 전도를 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을 교육하며 믿음 안에 살도록 가르치고 훈련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