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일 목요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6.법과 질서가 바로 선 교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6.법과 질서가 바로 선 교회)
본문 / 엡4:11-15

한 때 시계하면 스위스제품을 가장 손꼽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위스는 시계 산업의 주도권을 잃고 말았습니다. 스위스가 이렇게 주도권을 잃게 된 이유는 시계에는 반드시 톱니바퀴, 태엽과 바늘이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전자시계로 대체된 시계 시장은 일본 등 아시아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전통과 기성에 안주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미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측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1981년 빌 게이츠는 “메모리 640KB이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용량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25년이 흐른 지금 대부분의 컴퓨터 사용자들은 당시 빌 게이츠가 ‘호언’한 메모리의 100배가 넘는 용량을 사용 중입니다. ‘컴퓨터 황제’의 ‘무식한’ 발언에 놀랄 수도 있지만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래에 대한 빗나간 예견은 무수히 많습니다. 1950년께 맥아더 장군이 6ㆍ25로 폐허가 된 서울을 돌아보며 “이걸 복구하는데 100년은 걸릴 것이다.”라고 했고, 의사 겸 코카콜라발명가인 존 펨퍼턴은 1888년 자신의 코카콜라 제조법을 워커 챈들러사에 팔며 “이건 단지 소화제일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1931년 한 출판업자가 펄 벅의 <대지> 원고를 보고 “미국의 여론은 중국 냄새가 나는 것은 관심 갖지 않는다.” 고 거절했으나 193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1912년 E.J 스미스 선장이 타이태닉호의 출항을 앞두고 “타이태닉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하나님도 이 배는 침몰시킬 수 없다.” 고 호언했지만, 출항한 지 5일 만에 침몰되고 말았습니다. 1963년 한 미 과학처 관계자가 마우스 발명가인 더글러스 엔젤바트의 마우스에 대한 말을 들은 후 “무슨 소리인가. 그 누가 정보전달을 할 수 없는 마우스를 쓰겠는가. 여기에 투자하는 건 미친 짓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수억의 네티즌이 지금 이 순간도 마우스로 인터넷을 뒤지고 있습니다. 1946년 20세기 폭스사 회장이었던 대릴 자눅은 "텔레비전은 처음 6개월이 지나면 시장에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합판으로 만든 상자를 보는데 지겨움을 느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가정에서는 하루에 평균 2시간 이상씩 티브이 앞에 앉아 있습니다.

지금도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주요 구성원인 여성들의 취업이 일반화되고, 자가용이 일상화되었으며 주 5일제 근무가 곧 실시되었습니다. 예전과 엄청나게 달라지는 환경의 변화는 교회의 체질 개선해야 하고 또 개혁을 요구당하고 있습니다. 옛 방식을 고집하면서 변화하기를 거절한다면 교회는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교회들 중에는 건강한 교회, 병든 교회, 죽은 교회가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면, 건강한 교회는 자체적으로 잘못된 것은 고치고, 적응하고,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교회입니다. 병든 교회는 마치 환자가 의사의 손을 빌어 고침을 받아야 하듯이 타인에 의해 욕먹고 지적받는 등 남에 의하여 고쳐지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아예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고 아예 고치지 못해 결국 도태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므로 진리를 고치거나 진리는 바꿀 수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 영생에 관한 구원의 복음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 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꾸는 것은 진리를 담는 그릇 즉 패러다임입니다. 제도나 방법입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제도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마치 어린 시절에 입었던 옷을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입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열 살 때 입었던 옷을 지금도 입으려고 한다면 그 옷은 찢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그것은 첫째, 생각의 틀입니다. 둘째, 방법 곧 수단의 틀입니다. 셋째, 제도 혹은 법의 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대와 상황에 맞는 바른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바꾼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기준 즉 성경에 근거한 변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질서를 세울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모든 성도들에게는 은혜와 복이 되는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법과 질서를 세우는 기준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조하기를 어린아이 같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질서를 세웠고, 그 질서를 유지 할 직분 자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욕심대로 행합니다. 자기 맘대로 안 되면 투정부리고, 울고, 항상 자기만 생각합니다. 생각이 행동이 유치합니다. 관심을 끌려고 하고, 사랑받기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어린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 아빠의 관심을 끌기위해 오줌도 싸고, 엄마가 안 볼 때, 동생을 꼬집고 때립니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어른은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둡니다. 어느 성도가 어린 아이 신앙인가, 성숙한 신앙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구분합니까?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많이 함으로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자기 고집대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어린 아이 신앙이지만, 성숙한 신앙은 교회의 덕과 질서에 따르려고 힘쓰는 성도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어떻게 세울 수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배우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 중심이 되고, 주인으로 섬길 때 질서가 세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나 교회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바른 성도, 바른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왕 중심으로 뭉칠 때 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어느 신하가 권력을 휘두르거나 실력자들끼리 권력 암투가 일어날 때 나라가 무너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임에도 지도자들끼리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데서 교회가 시험이 들고 분열의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는 목사가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주장하고, 어느 교회는 어느 장로 혹은 안수집사가 자기들이 세운 교회라고 주장함으로 교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교회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든든히 서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몸 된 교회가 바르게 운영되도록 직분자를 세우셨습니다. 본문15절에서는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직분자를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고 교회에 입교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기가 세상에 태어남 같이 영적으로 새 생명을 얻어 출생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성도는 누구나 영적 어린 아기로 출생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갑니다. 아기가 사랑스럽고 귀엽지만 언제나 어린 아기일 수 없습니다. 언젠가 성장하여 스스로 일어서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건강한 몸으로 일하고 가정을 세워가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어른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기로 시작하였지만 언젠가 성장하여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연약한 자를 섬기고 봉사의 일을 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교회의 일군과 세상의 일군(직분)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직위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책임도 무거워지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기도 합니다. 진급할수록 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하급 직원에게 지시와 명령을 하고 그것이 잘 시행되는가를 확인하는 책임과 권리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부리는 최고 경영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사람의 위에서 사람을 부리고 명령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일에 남보다 앞장을 서는 섬김의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도하라’ 하고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라’ 하면서 나는 뒷짐을 지고 감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 섬기는 자리입니다. 교회에서 중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때 중직은 남보다 더 중요한 직분이라기보다는 일반 성도들 앞에서 더욱 앞장을 서며 섬김과 경건한 삶의 본을 보이는 책임이 무거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회의 직분은 신분과 계급이 아닙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는 것은 승진이 아니고 거룩한 책임의 증가입니다. 질서 있는 교회! 복된 교회는 직분 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처럼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 헌신하는 교회입니다.

2. 성경 말씀에 따라 교회를 운영할 때 질서가 세워집니다.
본문15절에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머리와 몸이 누가 더 중요한가를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머리가 없는 몸도 죽고 몸이 없는 머리도 죽습니다. 둘이 연합할 때 너도 나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가 몸의 역할을 할 수 없고 몸이 머리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기적 관계입니다. 서로 돕고 섬기는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사랑의 질서는 세상의 온갖 법을 능가합니다. 그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법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가정은 성문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은 엄연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엡5:23-25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자 아래 여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는 계급적인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역할이 다르다는 표현입니다. 신체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머리 역할을, 여자에게는 몸통 역할을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부부는 상전과 종의 관계가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고 협력하는 사랑하는 관계이듯이 교회도 온 성도가 서로 사랑으로 행할 때 좋은 교회 질서 있는 교회가 됩니다.

지난 금요일 저는 “금슬 좋기로 첫 손에 꼽히는 부부가 있다.” 기사를 보고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날개옷 대신 다리를 잃은 아름다운 선녀와 은도끼 금도끼 대신 한 팔을 잃은 듬직한 나무꾼, 현대판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은 충남 예산에 사는 임승복(61, 지체장애2급), 김예환(60, 지체장애2급)씨 부부가 그 주인공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남편과 임승복 씨는 7살 되던 해 나무에서 떨어져 왼팔을 잃었고 부인인 김예환 씨는 6살 때 골반 뼈를 다치면서 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인 예환씨는 앉은 채로 시집와 앉은뱅이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비록 부인은 앉은뱅이 이지만, 남편의 한 쪽 팔을 대신해 주었고, 일어서지 못하는 아내를 도와 식사준비며 빨래를 해주며 40년 동안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중매로 만나 한눈에 반한 후 40년 동안 3명의 자녀를 낳고 행복한 황혼을 맞이한 이 부부, 36세, 32세의 두 딸은 모두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스물다섯 막내아들도 서울에서 착실히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서로의 손발이 되어 돕고 섬기는 삶, 이것이 사랑입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의 피 즉 아카페적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라도 사랑이 없는 교회는 병든 교회요, 점점 죽어가는 교회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요일4:8). 또한 사랑만이 가정과 사회에 평화와 행복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능력입니다(요일3:11-12). 가인이 자기 아우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형제의 질서가 파괴되었고 유다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스승과 제자의 질서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에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진리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도 형제도 사랑이 없으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뿐입니다(갈5:14-21). 좋은 교회는 목회자와 중직자,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목회자는 자동차로 비유 할 때, 운전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운전대를 맡긴 이상, 운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제가 운전하고 다닐 때 집사람하고 다니면 제일 편합니다. 사실 저는 딴 것은 몰라도 길은 잘 알지만, 집사람은 딴 것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길눈은 영 어둡습니다. 어느 때는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참 돌아서 가도 잘 가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만일 자동차가 운행 중에 사고 나면 제일먼저 다치고 죽는 사람이 운전수입니다. 그러므로 운전수는 더 책임감을 느끼고 운전을 잘 하려고 노력합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마다 받은 은사가 다르기에 목회 방법이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목적지와 가는 길은 이미 성경에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길로 가더라도 목회자에 때라 조금 씩 다릅니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좀 다르고 또 목사의 부족과 연약함이 있더라도 담임목사의 목회가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다면 목회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 믿고 중직 자들과 온 교인들이 하나 되어 사랑으로 돕고 섬기며 목회자와 협력할 때에 교회는 질서가 잡히고 든든히 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후임자를 구할 때에 조만식 장로님과 그 당회는 누구를 택한 줄 압니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는 주기철 목사님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일본 명치대학 출신이고 사회적인 신분도 사회의 저명인사였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장로님이 교장으로 있던 오산학교 학생으로 제자였고 나이도 15세나 어렸습니다. 출신도 평안도가 아니고 경상도였습니다. 모든 면에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음에도 교회와 한국교계를 위해서 친히 마산까지 찾아가서 모셔왔으며 주 목사님이 순교당할 때까지 깍듯이 모셨던 것입니다. 과연 조만식 장로님은 큰 그릇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좋은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겸손한 조만식 장로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3. 덕을 세울 때 질서 있는 교회가 됩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라고 했습니다. 교회 생활은 내가 할 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무엇을 하면 안 됩니다. 또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안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못한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교회를 몸과 지체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하는 일도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몸이라는 기관들은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이 연신 입에다 음식을 넣어줄 뿐, 자기는 아무 것도 취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에게 많은 힘을 가져다줍니다. 눈은 무엇을 살피고 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봅니다. 다리는 걸어가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걸어갑니다. 그런데 눈이 피곤하다고 해서 걸어가면서 눈을 감는다면 온 몸이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입이 먹기 싫다고 벌리지 않는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의 원리는 곧 교회 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이 전부 내게 유익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신앙인이 나보다 다른 형제자매를 먼저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각자 신앙생활에 힘쓴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살므로 교회는 정말 천국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덕이란 소극적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10:32절에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전8:1에서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8:1) 그렇습니다.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덕이 없으면 성경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타인을 판단하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함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다툼과 싸움을 조장했습니다. 교회에서 자기주장만 옳다고 내 세우면 그것이 틀리지 않았더라도 덕 있는 행위는 아닙니다. 옳은 주장일지라도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떠나게 한다면 그 주장은 결코 하나님 앞에 칭찬들을 수 없습니다. 이에 반하여 적극적 측면에서의 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입니다. 고전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덕이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되도록 생활을 이끌어 가는 모든 것이란 말입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하겠지만, 그 외의 것은 내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만 하면 그것이 덕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 된다면 지는 것이 덕입니다. 양보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양보가 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23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덕을 세우는 길은 곧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도 이것이 남에게 유익이 될까? 생각해 보고 말하고, 행동도 이것이 남에게 유익이 될까? 생각해 보고 그렇게 행하면 그것이 덕을 쌓아 나가는 방법입니다. 덕이 세워지고 덕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요 질서 있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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