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일 목요일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
본문 / 느1:1-11

선물은 어느 때,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 첫째. 중요한 날이나 기념일(설과 추석, 성탄절 같은 명절 때와 돌 회갑 등 생일) 을 축하하기 위해, 둘째. 특별한 일을 축하 할 때(결혼, 이사, 승진, 문병, 입학과 졸업, 취업과 개업, 퇴직)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을 주고받는 대상은 임금과 신하사이에,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부부, 상사와 부하, 직장 동료와 친구 간, 애인 사이 등 다양한 인간관계 사이에 주어지거나 교환됩니다. 사람들끼리 주고받은 선물은 가는 정 오는 정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선물을 기대합니다. 받지 못하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은근히 자신이 선물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선물인 은혜는 차원이 다릅니다. 은혜는 조건 없이,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완전 공자입니다.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받은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는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고, 또 은혜를 베푸신 분께서 은혜 받는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주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핵폭탄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좋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곳은 정글일 지라도 황무지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사막도 옥토가 됩니다. 은혜가 제일입니다. . 은혜는 별미와 같습니다. 안 먹어 보고, 맛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맛을 모르게 때문에 눈앞에 있어도 먹어 볼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눈만 감아도 먹고 싶고(경북 포항의 과메기, 전라도 목포의 세발낙지와 홍어회, 강화도의 밴뎅이 회, 충남 서산의 간장 게장과 어리굴젓, 강원도의 막국수, 메밀묵 밥) 생각만 해도 입가에 침이 돕니다. 이와 같이 은혜는 받아 본 사람만이 압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 본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기를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느헤미야는 은혜를 받아 본 사람입니다. 은혜의 맛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의 맛을 알기에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11절에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민 2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 땅에서 강제로 바벨론에 끌려 온 포로였습니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왕의 최 측근으로 등용 될 만큼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이렇게 최 고위직에 오른 것이 자기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최 고위직에 오른 것이 깨달아 지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 할 길이 없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처럼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과 하나님께서 택한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소식에 궁금해 하던 차에 동생이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즐거운 소식이 아니라 매우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본문 1-3절에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성벽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B, C 538년(또는 537년)에 고레스는 바벨론을 무찌르고 메데와 파사 제국의 왕이 되자,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와 포로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스1:2-4). 스룹바벨을 필두로 하여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이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비유태계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마자 중단하게 되어 약 19년이 흐르게 됩니다. 19년 후인 B, C 519년 경 다리오 왕이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한 고레스 왕의 조서를 발견하고(스6:1-5) 성전 건축 공사를 재개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스6:6-12). 그 결과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성전공사를 4년 만에 마치고 봉헌식(스6:13-18) 을 마쳤습니다. 이 여세를 몰아 백성들은 힘을 내어 성벽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리오 왕이 죽고 아하수에로가 왕이 되자 대적들은 다시 왕에게 청원서를 냈고, 또 그 아들 아닥사스다가 왕이 되자 또 다시 청원서를 보내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지 못하도록 약 60년 정도 방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닥사스다왕 7년에 왕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습니다.(확인 할 수 없지만, 느헤미야가 청원한 것이 아닐까?) 왕은 제사장 에스라에게 2차 귀환을 명령하면서 더불어 행정관들과 재판관들을 정치와 종교의 전권을 장악하여 유대법과 페르시아법에 따라 재판하고 중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명하기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을 있는 네 하나님의…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유배시키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스 7:25, 26)고 했습니다. 이는 곧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제2의 탄생을 가능케 해 준 조서였습니다. 유사와 재판관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특별히 지방 정부차원에서 옛 유대 율법의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수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닥사스다 왕의 매부이자 팔레스타인 총독이었던 메가비주스가 아닥사스다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기원 전 448년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같은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성문을 불살라버렸습니다. 이 반란 소식을 알고 있던 느헤미야는 마음이 불안 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 성은 안전 한 것일까? 그런데 동생 하나니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려한 대로 성문이 불타고 완성되지 못한 성벽은 다시 허물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분노했습니다. 수일동안 울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 참된 성도는 언제나 은혜 아래 삽니다.
본문1절에 보니 느헤미야가 사는 곳이 “수산 궁”이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궁궐은 신앙을 유지하거나 키워나가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곳입니다. 궁중은 신앙생활에 도움받기 보다는 방해가 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궁중의 호화스런 생활은 사치와 방탕으로 흐르기 쉽고 또 도덕이 문란해서 기준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궁중은 인간의 탁월함과 자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교만을 부추기고 특히 왕의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왕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고민하게 되고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궁중에서의 높은 지위는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때론 어리석은 일로 취급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수산 궁의 아닥사스다 왕은 불을 섬기는 배화교 온갖 우상을 섬기는 왕이었기에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소수의 무리일 지라도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특별히 본문11절에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라는 말씀을 볼 때, 느헤미야가 함께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가 왕궁의 고위 관료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이곳 과테말라에 살고 잇는 것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느헤미야에게는 교회도 없고, 믿음의 식구들도 많지 않았지만, 소수의 무리가 모여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2. 성도는 더 큰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⑴ 현재 자신이 받은 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앞에 놓인 문제나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하는 간증을 듣거나 책을 보면 이러 저러한 문제와 소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 받았다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복을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받은 복과 은혜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형제와 이웃을 더 행복하게 하는 일에 쓰고 싶은 소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범적인 신자들을 보면 복을 받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해” 주시자(삼하7:1)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선지자 나단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2)라고 고백하며 은혜에 감사해서 성전을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이런 복된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다윗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 오며 내 집은 무엇이 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7:18) 라고 감격해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느헤미야도 포로민의 자녀로서 크게 성공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성공과 복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마음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구하는 것에나 생각하는 것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복된 생각으로 영광 돌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⑵ 나를 보내소서! - 쓰임받기를 소망 할 때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항상 ‘왜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을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동생 하나니가 예루살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반란이 일어나 성문은 불타고 성벽을 다 허물어 졌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바사나라의 고관이 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쓰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항상 여러분들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고 들은 사람이 책임져라!’ 하나님은 우연히 보게 하시거나 듣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더도 하나님께서 왕후가 되게 하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한 날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머뭇거리자 삼촌 모르드게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라”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맡기시려고,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현재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지위와 권력을 마음껏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벽과 성문의 역할은 그 어느 것 보다 요긴하고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① 성문과 성벽은 자주권의 상징입니다.
수 세기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거하도록 예루살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모리아 산의 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창22장) 그 모리아 산이 바로 미래의 예루살렘 성의 성터입니다. 이 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자신의 왕궁과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곳입니다.(대하3:1) 예루살렘은 희생 제사를 드리고 진실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와 찬양이 계속 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자주국가로서,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리는 제사장적 권세를 발휘하는 복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것은 왕도 없고 주권도 없는 패망한 나라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느2:17)고 했습니다.

② 안전보장의 상징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자 성안의 거민들에게는 안전 보장이 사라졌습니다. 언제 외부의 원수들의 공격을 당할지 무방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성벽은 백성들을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벽과 성문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벽입니다. 성벽이 허물어져 있으면 항상 맹수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열리면 적은 쉽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벽이 없는 예루살렘에는 이방의 족속들이 언제든지 넘나들 수 있었습니다. 추수해서 곡식을 곳간에 모아두면 이방족속들이 무너진 성벽으로 달려 들어와서 곡식을 가져가고 어린 아이와 여자들을 착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오늘 마귀는 우리의 무너진 성벽과 성문이 어디인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건드리면 완전히 무너지는가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곳을 막아야 합니다. 재건되어야 합니다.

③ 신앙의 경계선
예루살렘 성벽의 또 다른 의미는 이방 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보호막이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보호가 무너지고 구별됨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성이 훼파되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이 사이에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안과 밖에 구별이 없어지니 육적인 것이 들어오고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와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안식일 날에 대한 구별도, 예배에 대한 신령함도,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 모습은 영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벽이 없으면 이방의 그릇된 사상과 우상의 죄악들이 여과 없이 침투되어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인 우리의 마음속의 성전이 완전 파괴되어 이방인과 동일한 사람들로 변하게 됩니다. 이는 성전에서 안전하게 예배드릴 수 없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항상 있습니다. 진리와 말씀으로 든든히 성곽을 쌓지 않으면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훼파된 성벽, 교회의 적들은 바로 이곳을 통해 들어와서 피해를 입히고 성도들은 넘어뜨리고 그들을 파멸의 길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런 악한 일들은 경건한 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데, 마음이 아픈 까닭은 이 악들로 인해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고 선량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문이 불에 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강도들에게 짓밟히고 이방 종교와 우상 숭배자들이 자유롭게 성을 드나들며 하나님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해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자신이 쓰임받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어떤 가슴 아픈 사건이 보이십니까? 어떤 종류의 슬픈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가슴 아프고 속상하고 슬픈 일을 해결하여 기쁘고 즐겁고 복되게 만드는 일에 나를 써 달라고 간청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⑶ 구체적 목적으로 확신에 찬 기도를 할 때 더 큰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 5절에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부르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심을 고백할 때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크고 위대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크신 분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영국의 윌리엄 케리는 세계선교의 창을 열기 위해서 배를 타고 인도의 바다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 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크고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시도하라.” 우리가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기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큰 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둘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본문 6-8에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만일 너희가 범죄 하면 내가 너희를 민족들 가운데로 널리 흩을 것이요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게로 돌아와 내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너희 중에서 하늘 맨 끝 지역에까지 쫓겨 난 자가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데려오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신30:3-4을 통해 모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확신있는 기도는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죠지 뮬러 목사님은 시68:5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는 이 말씀 붙들고 수천의 고아를 먹였습니다.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셋째, 긍휼을 베푸시는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입니다. 눅18:11-14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입니다. 긍휼은 곧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금식기도는 지금까지는 육체의 힘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야 할 것을 믿는다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사58:6-9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의 기도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확신이 있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자 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지만, 지금 부터는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도록 이전 보다 더 큰 은혜를 내려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느헤미야와 같은 이런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시는 제일장로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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