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5일 금요일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본문 / 엡5:22-33
<타임>지에서 25년 이상 근무하는 동안 백악관 담당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여성방송인재단 이사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저널리즘스쿨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보니 안젤로가 쓴 책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란 책에 보면, 미국 근대 대통령들의 성격과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11명의 어머니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그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칭찬과 벌을 통해 아들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불어넣은 활기찬 실천가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스벨트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고집쟁이 민주당원 마사 트루만, 열정적인 평화주의자 아이다 아이젠하워와 용감한 여성 도로시 포드, 진솔한 평화봉사단원 릴리언 카터 등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어머니들의 교육과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지미 카터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 첫날,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백악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조지아 주 지사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중앙 정가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인물이었기에 기자들로선 그 '시골뜨기' 무명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의 입에서 어떤 취임 소감이 나올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기자들에게 카터는 대뜸 "내 어머니부터 만나보라"며 곁에 있던 79살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 여사를 소개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으나마나 싶은 질문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죠?" 그러자 릴리언 카터는 태연하게 "어느 아들 말이야?" 카터 여사에게는 장남 지미 말고도 차남 빌리가 있었지만 빌리 카터는 세상의 잣대로 따져 '성공'했다고 말할만한 사람도, 형 지미에 견줄만한 이력을 가졌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릴리언 카터가 백악관 기자들에게 던진 유머는 모든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입니다. 카터여사에게는 대통령이 된 아들이건 그렇지 못한 아들이건 간에 자기가 키운 아이들은 똑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메시지가 그 유머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릴리언 카터는 고령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미스 릴리언'이라 불렀을 정도로 활기 넘치고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과 인권에 대한 헌신이 남달랐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평화봉사단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단원이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아들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68세의 그녀는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고 인도까지 가서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귀국 후에는 남부 흑인들과 빈민을 삶을 극진히 살핀 간호사로 평생을 보내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항상 '미스 릴리언'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과 영향을 받은 카터는 대통령 재임 시에도, 퇴임한 후에도 평화와 봉사를 삶의 이정표로 여기고 섬기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에게 존경받고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는 영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거나 유명한 사람 뒤에는 항상 아내가 훌륭하다든지,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말은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훌륭해서 자녀가 유명인사가 되었다든지 혹은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 만큼 아버지들이 자녀 교육에 소홀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남자들은 은근히 화도 나고 속도 상할 것입니다. 왜냐면 남자들도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헌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남자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왜 남자들의 희생은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 됩니까? 그것은 남자들이 희생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헌신이 2%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2%의 부족은,

첫째. 무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이 무엇을 뜻하는 지 100%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결혼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그 첫 번째 대답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푹 빠졌어요." 일단 멈추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그들은 계속 행복 할 것이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에 감동되고 도취됩니다. 이는 소설과 극장이나 TV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연속극에 의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장되는 것입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고 평생토록 남편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창2:24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했고, 오늘 본문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반드시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하나의 파트너(Partner)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동업자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아내를 좋은 짝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짝은 각각 다른 존재인데 합해진 경우입니다. 짝에는 두 개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좋은 짝이 아니라 내 몸입니다. 하나입니다. 결코 아내와 남편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 할 때부터 이미 결혼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내는 남편의 일부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지으셨습니다. 만일 아내가 파트너요, 짝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버리고 다른 파트너, 다른 짝을 찾으면 됩니다. 오늘날 이혼율이 높은 이유가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아내를 몸의 일부요,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편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음 과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욕되게 합니다.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몸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욕되게 하면 반드시 후유증이 심각해집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아내를 무시하는 것 때문에 많은 아내들이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혼한 남자는 결코 혼자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아내를 동반해야 되고 아내를 배려해야합니다.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과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에 있어서, 혹은 남편 혼자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사에 아내와 함께 해야 합니다. 아내는 집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가정은 남편이 잠자러 들어오는 기숙사가 아닙니다. 아내가 내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금만 더 배려하시면 100점짜리가 됩니다. 부족한 2%를 채우시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오늘 본문24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죽기까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 남편을 위해 죽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들이 최선을 다해놓고 마지막 순간, 즉 죽어야 될 순간에 죽지 아니해서 그 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사망의 뜻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부인을 말합니다. 남편들이 자기를 부인함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의 구체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직장에 다닙니다. 열심히 일했음에도 승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 친척이라는 젊은 사람이 그 부서의 팀장으로 낙하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상사, 나이도 10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사장 친척이라는 이유로 부임을 하더니 날마다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모욕도 주고 그따위로 일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합니다. 속에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다닐 직장이 없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만둘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천진난만한 애들과 아내가 반겨줍니다. 속도 모르고 우리 아빠 최고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참고 견딥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창피함도 버리고, 다 버리고 나 죽었소! 합니다. 묵묵히 참고 직장을 다닙니다. 나 혼자 몸이라면 정말 당장 집어 치울 수 있지만 가족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집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 사람들은 침을 뱉었습니다.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욕을 퍼 부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옷을 벗기어 벌거숭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신 예수님은 이 모는 수치와 치욕 그리고 죽음까지도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감수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나 일부 남편들 가운데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던져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일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존심을 더 내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자신을 황제로 대접받으라고 부추깁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고,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보다 자기가 더 우선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일이 잘 될 때는 가족도 생각하고 아내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고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오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 내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래서 요즈음 자살하는 남편들이 많고, 집을 나와 노숙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놓고 무책임하게 버리는가? 하면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합니다.

사람 속에 거하는 죄는 희생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기 생각만 하게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고 했지만, 도움 받고 싶은 거지 근성을 발동시킵니다. 아담이 죄를 범 한 후 하나님께서 왜 죄를 지은 지었느냐고 물으니 하나님 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줌으로 먹었다고, 하나님과 하와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은 하와를 보자 "당신의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각종 핑계를 만들어 자기 합리화하게 합니다. 시대 탓, 환경 탓, 아내 탓, 심지어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합니다. 자기 잘못은 없습니다.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유혹과 자기연민을 이기지 못해서 남편의 의무인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마치 장애물로 취급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 여자 말고 다른 여자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이 문제 즉 죄의 유혹,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주님으로 모셔드리는 길 뿐입니다.

셋째. 좋은 모델이 없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술 먹고, 상 엎고, 소리 지르고, 아내를 때리는 남편, 아버지는 많이 보았는데 목숨 걸고 아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남편들을 보고 들은 적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좋은 남편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아내들을 많이 두었고, 위험한 순간에 아내를 보호하기 보다는 부인을 이용해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좋은 남편의 예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부족함에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누더기와 같고 언제라도 배신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열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29-30절에서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했습니다. 왜냐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3:7) 여러분의 아내가 체질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습니까? 성격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어 신경질적입니까? 아내의 약한 부분은 남편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면 약한 사람은 질병에 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화를 내면서 병에게 욕을 하고 꾸지람을 합니까? 아닙니다. 침대에 편히 누워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합니다. 이럴 때 몸은 병을 이깁니다. 이와 같이 아내의 연약과 아픔을 내 몸이 아플 때와 같이 보호해 주고 치료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 교회를 사랑했다면 연약한 남편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남편들이 힘들고 남편 구실을 잘 하다가도 넘어 집니까? 그것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 힘이 빠지고, 진이 빠져 낙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아 교회를 사랑하고 보호하셨듯이 남편들도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고 했습니다. 주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철야기도도 하셨습니다. 무시로 성령안서 기도했습니다. 남편 여러분이 기도할 때 가정이 삽니다. 아내가 삽니다. 자녀가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남편은 가정의 머리로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능력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⑴
엡5:15-6:4

사람들에게 백두산의 제일 큰 소나무는 몇 그루일까요? 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즉시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백두산에 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저도 백두산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한 그루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몇 개일까요? 하나입니다.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제일 좋은 것은 두 개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 보면 사람들은 믿음, 사랑, 전도, 예배, 기도 등 여러 가지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도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그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이에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관계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부부가 다투고 어찌 가정이 바로 서겠으며, 목사와 성도, 성도와 성도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어찌 교회가 바로 세겠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끼리 다툰 다면 과연 선교가 되겠습니까? 인간관계가 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틀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드릴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제단 앞에 내려놓은 먼저 형제와 사과 한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계회복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고기타는 냄새가 너무 싫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조하셨는데, 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제물로 바쳐진 고기타는 냄새가 싫다고 했을까요? 이유는 그들이 다투고 서로 미워하며 형식적으로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관계가 깨지면 모든 것이 깨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모범을 따라 가정이 바로 세우는 비밀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가정이 바로 세워지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의 바르게 유지하여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먼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는 첩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했고, 23절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했습니다. 또 부모와 자녀간에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법 또한 순종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계신 여성여러분! 특별히 아내 되시는 성도님들께 먼저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남편에게 정말 복종하시며 남편을 자기의 머리로 여기십니까? 또 자녀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부모님께 순종하십니까? 잘은 모르지만, 대부분 ‘아니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어느 TV프로그램에서 나이 드신 부부가 스피드 퀴즈 게임에 출연했습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내고 할머니가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무제를 보신 할아버지가 “당신과 내 사이를 뭐라고 하지?” 그러자 할머니는 거침없이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두 자가 아니고 네 자로 말해봐!”라고 하시자 할머니는 “평생 웬수”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답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왜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평생 웬수로 알면서도 함께 살았을까요? 부부가 평생웬수가 아닌 평생 은인으로 살수는 없을까요? 오늘날 많은 부부가 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불순종이 죄라는 사실을 몰라서 복종치 않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아담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그 하나님의 명령을 하와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아담의 말을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창3:16에 보니 “내가 네게 임신의 수고로움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네가 괴로움 속에서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너는 남편을 지배하려 하나 그가 너를 다스릴 것이다.”(창3:16) 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타락 이후로 아내들은 항상 남편을 지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리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남편에게, 부모에게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준비된 것은 형벌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둘째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사명을 망각해서 불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은 후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현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었습니다. 창2:18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해서, 사람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왜냐면 사랑은 혼자 할 수 없고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독처하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눈에는 좋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 말은 ‘그에게 알맞은 돕는 사람을 만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돕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따라 주어야 합니다. 이는 남자는 우등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돕는 일 즉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을 버리고 남편을 다스리려고 하니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관계도 깨뜨립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을 돕는 일, 즉 남편의 부족과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 아내의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를 축원합니다.

셋째, 너무 가까워서 불순종합니다.
부모와 자녀사이는 천륜이라고 합니다. 부부사이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를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또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부가 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매우 가깝습니다. 모든 허물을 다 압니다. 당신이나 나나 별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의 말이 우습게 들립니다. 별거 아니어서 잘 하면 이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들이 집니다. 부인 말 안 듣는 남편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남편을 조종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의견을 부모님들이 따라 주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은 남편의 말은 언제나 옳고 또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아내의 의견이 틀렸다는 뜻도 압니다. 이는 마음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돕고 섬김의 자리에서 서 있는가? 아니면 조종하고 다스리는 자리에 서 있는가? 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서 개념이 없습니다. 자기 편리 한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22절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비록 가까운 사이요, 편한 사이이지마는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넷째, 불순종하더라도 따로 처벌할 법이 없습니다.
부부지간에, 부자지간에 불순종했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벌을 내려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했을 때, 여러 가지 형태로 징계하시고 또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시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셨고, 또 만나를 6일 동안만 내리시고 제7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서들이 불순종 할 때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흉년이 들게 한다든지 아니면 이웃 나라가 침범해 들어와 모든 진기한 보물을 빼앗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뺏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아내나 자식이 불순종해도 징계를 내리거나 벌 할 수 없습니다. 벌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이 지켜지지 않고 질서가 무너져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잘 지켜지지 않아도 징계할 수 없는 법과 질서를 세워 놓으셨을까요? 이유는 아내와 남편이라는 질서는 사랑 안에서 지켜지는 것이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돕고 섬기는 가운데 세워져야 하고, 특별히 가정은, 아내와 남편의 바른 관계는 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법이 사랑 안에서 지켜질 때 행복과 기쁨이라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이와 같은 질서를 정하신 것입니다.

다섯째. 잘 하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문제 있는 부부를 보면 항상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문제있는 자녀들도 항상 부모에게 원망이 많습니다. 반면 행복한 부부를 보면 항상 자기는 잘 못하는데 좋은 아내 때문에, 좋은 남편 때문이라고 서로에게 공을 돌리고, 또 훌륭한 자녀들은 부모님의 은혜라고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일반적으로 남편들보다 아내들은 이상하리만치 기억력이 좋습니다. 특별히 부인들이 잘 기억하는 것은 시집와서 고생한 것, 속상하고 억울한 것,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로 받은 상처나 아픔 그리고 자기가 남편이나 시댁식구들에게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잘한 것과 남편이 잘 못한 것을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항상 아내는 억울하고 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너무 잘하고 고생하고 힘들었는데, 남편은 아내의 ‘수고와 고생을 몰라준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복종하거나 순종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한 살이 더 먹어 갈수록 남편들은 아내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농담 삼아 하는 말이‘40대 남편은 부인이 곰국을 끓이는 것이 무섭고, 50대 남편은 이사 갈 때 꼭 이삿짐 트럭 앞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60대 남편은 여행을 가면 부인의 손 을 꼭 잡고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성도 여러분! 그리고 자녀 된 여러분1 여러분만이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여러분의 부모님과 남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결론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하듯이 성도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께 순종과 복종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가 좋은 관계, 부모와 자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화목한 가정, 복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성도는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여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땅에서도 은혜와 복을 누리고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있는데, 그것은 마25:31-33의 말씀입니다.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렇다면 오른편에 속한 자와 왼편에 속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다. 먼저 오른편에 속한 자들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마25:34-40에 보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왼편에 속한 자들에게는 이렇게 다음과 같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1-45)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은 마7:21-23에 나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렇다면 오른편과 왼편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웃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불신자들과 연약한 이웃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참 성도요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이와같이 가족을, 불신 영혼을, 연약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⑸ 장자는 기도의 용사다.


⑸ 장자는 기도의 용사다.

어느 단체이건 문제가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장자가 있는 조직은 문제를 쉽게 해결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기회로 선용한다. 그러나 장자가 없는 조직은 해결도 못하면서 말만 많고, 그러다가 결국 작은 문제도 크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교회에 선생은 많은데 아비가 적다는 것이다. 선생은 항상 가르치려고 하고, 시끄럽게 떠드나 아비는 그것을 몸으로 안아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다. 마치 강제구 소령이 훈병이 잘못 던진 수류탄이 온 몸으로 감싸고 산화한 것과 같은 원리다. 교회도, 가정도, 국가도 이런 장자가 필요하다. 특히 믿음 안에서의 장자는 문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힘을 잃어가도 있는 이유는 교회 안에 장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성에 의인 50, 45, 40, 30, 20, 10인을 위해서라도 성을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피를 토하는 기도를 드렸다. 결국 그 성에 의인 10인 없어 멸망하긴 했어도, 아브라함의 erl도를 통해 조카 롯과 그의 딸들은 구원을 받았다.(창19: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고 있는 동안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 우상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신이라고 여기며 그앞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며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백성을 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하자, 모세는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출32:32)라고 담대히 기도하여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였다.

그래서 혼란한 사사시대를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를 연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다. 나라의 모든 일을 사울에게 맡기고 고향 라마 나욧으로 돌아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고 했다.(삼상12:23) 한편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사자굴속에 들어 갈 줄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였고, 두루마리 책을 통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의 기한이 이르렀음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 받아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금식하며 주여! 주여! 주여! 크게 외치며 기도했다.(“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단9:3,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단9:19) 한편 포로시대에 포로민의 자녀로 태어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왕으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지명 받아 직접 성벽을 재건하는 은혜를 누렸다.

특별히 우리의 영원한 장자 되시는 예수님은 새벽에도 기도하시고, 철야하며 기도하시고,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무릅쓰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사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처럼, 장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다. 이런 장자가 있는 교회가 곧 장자 교회다. 기도함으로 장자가 되고 기도하는 장자교회가 되라.

⑷ 장자는 말이 예쁘다.


⑷ 장자는 말이 예쁘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라가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불신자들이 다른 점을 가장 쉽게 구별하려면 먼저 말을 들어보면 된다. 그 한 가지 예로 예수님의 평상시 언행과 바리새인들의 말을 비교해 보면 금방 차이가 난다. 하루는 제자들이 나면서 소경이 된 사람을 보고 물었다.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다. 이에 반하여 바리새인들은 항상 정죄하고, 시비 걸고, 말을 만들어 흉보는 일을 즐겨했다. 바리새인들의 입에서는 언제나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말만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와 같아 독을 가진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민14:28-29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말이 씨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말이 장자다워야 한다. 왜냐면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마12:37에서는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했고, 잠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했다. 또 잠18:20-21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강조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장자를 꼽으라면 단연 요셉일 것이다. 그는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었으나 장자로 세움을 입었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잠사 살펴보면, ⑴ 꿈을 이야기 했다. (창37:6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⑵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고백했다. (창39:9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 ⑶ 불평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⑷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렸다. (창41:16 -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⑸ 심지어 자기를 팔아넘긴 형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로 일관했다. (창45:5-8 -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50:20-21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과연 요셉의 말은 장자답다.

말과 입의 위험성과 중요성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가리지 않고 강조 또 강조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3:2) 고 했고, 심지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약3:6)고 경고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이 예뻐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한입으로 찬송하고 한 입으로 저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약3:8-11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그러므로 장자는 말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자다운 말을 하는 사람만이 장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하기 전에 먼저 엡4:29의 말씀을 떠 올린 후 입을 열어 말할 때 언행에 성공하는 자가 것이고 장자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⑶ 장자는 꿈이 크다. 비전(VISION)이 확실하다.


⑶ 장자는 꿈이 크다. 비전(VISION)이 확실하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이 비전(VISION)입니다. 비전이라는 말의 정의는 생각하는 측면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겠으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비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이 나의 꿈과 나의 소망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는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이 계획을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하여 이뤄 가신다. 그러나 이무나 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지 않고 오직 비전을 가진 자 즉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계획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이뤄지기를 바라며 이일을 최 우선순위에 둔 사람을 통해 이루신다.

성경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고전10;31)는 말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은 다 이 비전에 주안점을 둔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전이 잇는 사람을 이 비전을 사명으로 여기며 산다. 비전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사명으로 여기지 않는 다면 이것은 비전이 아니다. 사명은 목숨 걸고 이루어 내야 하는 꿈, 먹는 이유, 잠자는 이유, 공부하는 이유, 돈 버는 이유가 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선용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곧 비전의 사람이다.

이 비전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거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경우도 있고, 사람을 통해 말씀해 주시는 경우도 있으며,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장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허락해 주신다. 그러므로 비전을 받고, 비전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또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듣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비전은 하나님께 영광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온유한 교회! 중미 선교의 허브가 되고 복음으로 세계를 먹이는 교회! 괴로움과 방황, 가난과 질병 부모 잃고 못 배워 눈물 흘리는 이웃과 형제의 필요를 채워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교회! 인재 양성을 통해 더 복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 이다. 이를 위한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겠다.

성경에 보니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비전의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말씀을 통해 홍수에 대한 경고를 듣고 평생을 방주는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나아갔고, 야곱은 장자의 비전을 어머니를 통해서 듣고 평생을 걸고 장자의 명분을 얻고 이를 유지하는데 헌신했다. 요셉은 두 번의 꿈을 통해 장자의 비전을 가지고 이 비전이 이루어 질 때 까지 종으로, 죄수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했다. 그래서 시105:17-19에서는 “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라고 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캐리는 인도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1793년 영국을 떠난 이래 아내와 자녀를 먼저 하나님께 보내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평생 인도에 살며 인도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도록 헌신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얀마 선교의 비점을 가지고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죽는 순간까지 순회 설교를 중단하지 않았다. 죠지뮬러는 고아의 아버지로 평생을 살았으며, 방지일목사님은 한국인 최초로 중국 선교사가 되어 헌신했다. 몇 년 전 소천하신 한국유리 회장 최태섭장로는 기독교 윤리에 입각한 회사 운영을 비전삼고 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이외에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가지고 비전을 이루며 멋있게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비전을 받는 것과 비전을 소유한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 비전을 이루는 과정은 많은 땀과 눈물,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는 비전 즉 땅 끝까지 복음 증거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고, 모세는 출애굽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평생 광야에서 살았다. 이 세상은 세상 풍조에 밀려 사는 군중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가진 소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비저너리들에 의해 유지되고 발전된다. 장자가 되라! 비저너리가 되라!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⑴ 야곱의 간증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⑴ 야곱의 간증
본문/창28:10-22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너무 귀하고 좋아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 했든지, 사람들은 이 젊은이를 송전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성은 송씨였지만, 이름은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도 많이 하므로 전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송전도' 인데 우리나라의 유명하신 최권능 목사님과 같은 경우입니다. 최 목사님의 본명은 최봉석이었지만, 하도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여서 별명이 '권능' 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보다도 별명인 '최권능' 으로 더욱더 유명해 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기도 이 송 전도라는 사람은 4남매를 남기고 젊었을 때 죽었습니다. 자녀가 4명이나 되는데, 남편이 전도만 하다가 죽었으니 그의 부인은 참으로 딱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부인도 어렵고 힘든 일을 다 하면서도 이 4남매를 믿음으로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 가난한 중에서도 십일조를 꼬바꼬박 드리며 아이들에게 십일조 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또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기도 시간을 빼놓는 일이 없습니다. 주일날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4남매를 꼭 데리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수주일을 했습니다. 4남매 모두 이렇게 어머니의 믿음을 보고 그대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4남매가 자라서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4남매 중, 아들 이름은 송자문인데, 이 사람은 남경 정부가 들어설 때 재정총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첫 딸은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손 문 선생의 아내요, 둘째는 장개석 총통의 아내인 송미령이고, 셋째는 수석 국무위원인 공상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믿음을 낳고 충성이 충성을 낳는 것처럼 이 4남매는 이렇게 하나같이 잘 되었습니다. 믿는 대로 되리라 하신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 송 전도는 믿음의 본을 보였던 아버지였고, 그의 아내는 믿음으로 자녀를 키웠고 그 결과 말씀대로 자손이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바른 믿음 생활을 통해 은혜와 복을 누렸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간증이라고 합니다. 간증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므로 그분을 제대로 만나기만 하면 엄청난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어떤 은혜와 가 풍성한 복을 누렸는가를 알려주는 간증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그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났을 때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난 장소에 특별한 이름을 지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은 벧엘이라 바꿔 불렀고, 두 번째 큰 은혜를 받은 장소의 원래 이름은 길르앗이었으나, 마하나임으로 바꿔 씁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은 본래 이름은 얍복 나루였으나 야곱은 브니엘이라 바꾸었습니다. 이 모두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큰 은혜를 받은 간증이 살아 숨 쉬는 곳이며,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잇는것은 우리 또한 이런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1. 루스에서 벧엘로
루스의 뜻은 ‘편도나무’라는 뜻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곳을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문16-19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모태신앙으로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살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들로부터 듣고, 부모님과 함께 예배도 드렸지만, 막연하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런 그가 부모를 떠나 먼 길을 가다가 들판에 누워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모님이 살고있는 헤브론에만 계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야곱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⑴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하나님의 편재성)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육을 가진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어디에서 동시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 선원들도, 깊은 굴속에 잇는 광부들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나 대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것도 숨길수가 없고,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성경은 정직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시11;13)

⑵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두 배에 가득 찰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고 난 후 베드로의 첫 번째 고백은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이었습니다. 오늘 야곱도 하나님을 만난 후 첫 마디가 “두렵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의인인체 하고, 의롭다고 자처하고, 죄를 지은 후에도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살아 있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심판대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나면 큰일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면 심판대 앞에서 만났을 때 격려와 위로를 받게 됩니다.

⑶ 비전과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본문13-15절에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살아남기 위해 단순히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야곱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도망지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연단의 길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비전, 즉 사명을 가진 사람은 결코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고난은 있겠지마는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반드시 사명을 완수 할 수 잇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 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⑷ 예배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의 지도에 따라 억지로, 마지못해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억지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은 물론이요,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도 예배를 소홀히 하고, 예배의 태도가 불성실하고, 헌금 드리는 것이 불편해 합니다. 예배를 형식적으로, 하나의 순서로 의미 없이 드립니다. 큰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경배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가장 귀한 것을 바쳐 경배 드립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진 것이라고는 기름병이 전부였기에 그것을 베개하였던 돌 위에 붓고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만난 간증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다멕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만난 간증을 햇습니다. 여러분들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길르앗에서 마하나임으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신감을 가지고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에 도착한 야곱은 그곳에서 20년을 삼촌에게 고용되어 일꾼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삼촌은 야곱보다 한 술 더 뜨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야곱과의 약속을 10번이나 바꾸었습니다. 14년은 두 아내를 얻는데 보냈기 때문에 품삯을 받고 일한 것은 6년입니다. 그러니까 삼촌은 야곱과의 약속을 1년에 두 번씩 바꾼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교묘하고 야비한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군대를 동원하여 지켜주시고 보호하셨습니다.(창31:7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삼촌이 야비하게 야곱의 정당한 품삯을 빼앗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도와주셔서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창31:8-9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20년이 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얻은 아내들과 아들 딸 그리고 종들과 짐승들을 모두 이끌고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삼촌이 이것을 기회삼아 야곱을 죽이고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야곱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나님의 사자가 삼촌 라반에게 나타났습니다. “야곱에게 손을 대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아침에 야곱을 만나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창31:29)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일로 라반은 야곱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 돌아갔습니다. 그 때 까지도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기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마치고 길을 가는 중에 하나님의 사자들인 천사들이 자기와 가족들 그리고 모든 짐승의 떼를 호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를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십니다. 야곱은 잘 몰랐지만, 지난 20년 동안 야곱이 건강하고 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보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잘해서 그렇게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도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아내의 교통사고 때 천사가 보호했습니다. 2주 전 월요일 밤에도 천사가 저를 인도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작은 사업 중에도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도와주셨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고 간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입술을 열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신에 감사드리며 간증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얍복에서 벧엘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합니다. 열심히 삽니다. 밤 낮 가리지 않고 일합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 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창31:38-40) 그러다가 이 문제가 해결되면 ‘이제는 편하게 먹고 쉬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또 사명을 감당하라고 물질도 건강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망각합니다. 이럴 때 시험이 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삼촌 라반과도 화해를 한 후 즐거운 마음으로 20년 동안 모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금의환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다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착잡합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어떻게 이룬 가문인데, 방법이 없습니다. 뇌물로 형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별 효과가 잇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형을 피해 멀리 도망갈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말 타고 쫓아오는 형에게서 어린 자식들과 짐승 떼를 이끌고 도망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와 밤새도록 씨름 했습니다. 한번만 도와주시라고, 한번 만 더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달랐습니다. 제발 이제는 육신이나, 물질 등 눈에 보이는 것이 억매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과 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번만 해결해 주시면 믿음대로 살겠다고, 자꾸 조건을 내 걸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환도 뼈를 부러뜨렸습니다. 더 이상 육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는 뜻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육신적인 야곱에서 영적인 이스라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살던 야곱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이스라엘로 변화되라는 뜻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잘되는 것만을 목표로 살던 야곱이 이 땅에서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잘 사는 이스라엘, 오직 나와 내 가족만을 우해 사는 야곱이 이웃과 불신 영혼을 위해 선교하고 전도하며 사는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씨름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옛 사람과의 씨름입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먹을까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 했다면 앞으로는 맡은 바 사명 감당을 위해 씨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 나만을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이기고 이웃과 형제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총 동원하여 잘 받들고 섬기는 성도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부자가 되고, 자녀가 잘 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받은 복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이렇게 헌신하며 충성하며 살고 있습니다.” 라고 간증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비전을 위해 사는 성도, 육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영을 위해 사는 성도,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불쌍한 이웃을 섬기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꿈꾸며, 이렇게 살고 있다고 간증해야 합니다. 야곱의 삶을 청산하고 이스라엘로 살고 있다고 간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