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25일 금요일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려면⑵
본문 / 엡5:22-33
<타임>지에서 25년 이상 근무하는 동안 백악관 담당 특파원을 지냈고, 현재는 국제여성방송인재단 이사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저널리즘스쿨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보니 안젤로가 쓴 책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란 책에 보면, 미국 근대 대통령들의 성격과 성장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11명의 어머니들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그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칭찬과 벌을 통해 아들에게 끝없는 에너지를 불어넣은 활기찬 실천가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 루스벨트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고집쟁이 민주당원 마사 트루만, 열정적인 평화주의자 아이다 아이젠하워와 용감한 여성 도로시 포드, 진솔한 평화봉사단원 릴리언 카터 등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어머니들의 교육과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지미 카터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미 카터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 첫날,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백악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조지아 주 지사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중앙 정가에서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인물이었기에 기자들로선 그 '시골뜨기' 무명인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그의 입에서 어떤 취임 소감이 나올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기자들에게 카터는 대뜸 "내 어머니부터 만나보라"며 곁에 있던 79살의 어머니 릴리언 카터 여사를 소개했습니다. 한 기자가 물으나마나 싶은 질문 하나를 내놓았습니다. "아드님이 자랑스러우시죠?" 그러자 릴리언 카터는 태연하게 "어느 아들 말이야?" 카터 여사에게는 장남 지미 말고도 차남 빌리가 있었지만 빌리 카터는 세상의 잣대로 따져 '성공'했다고 말할만한 사람도, 형 지미에 견줄만한 이력을 가졌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릴리언 카터가 백악관 기자들에게 던진 유머는 모든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입니다. 카터여사에게는 대통령이 된 아들이건 그렇지 못한 아들이건 간에 자기가 키운 아이들은 똑 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메시지가 그 유머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릴리언 카터는 고령이 되어서도 사람들이 '미스 릴리언'이라 불렀을 정도로 활기 넘치고 사회를 위해 봉사활동과 인권에 대한 헌신이 남달랐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미국 평화봉사단 역사상 가장 나이 많은 단원이었다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아들이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68세의 그녀는 평화봉사단에 지원하고 인도까지 가서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있었고, 귀국 후에는 남부 흑인들과 빈민을 삶을 극진히 살핀 간호사로 평생을 보내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항상 '미스 릴리언'으로 불렀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과 영향을 받은 카터는 대통령 재임 시에도, 퇴임한 후에도 평화와 봉사를 삶의 이정표로 여기고 섬기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에게 존경받고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는 영예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공하거나 유명한 사람 뒤에는 항상 아내가 훌륭하다든지,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말은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훌륭해서 자녀가 유명인사가 되었다든지 혹은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어머니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그 만큼 아버지들이 자녀 교육에 소홀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자들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남자들은 은근히 화도 나고 속도 상할 것입니다. 왜냐면 남자들도 평생 가족을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헌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남자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왜 남자들의 희생은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 됩니까? 그것은 남자들이 희생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헌신이 2%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2%의 부족은,

첫째. 무지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이 무엇을 뜻하는 지 100%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결혼을 왜 하느냐고 물으면 그 첫 번째 대답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푹 빠졌어요." 일단 멈추어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며, 그들은 계속 행복 할 것이며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에 감동되고 도취됩니다. 이는 소설과 극장이나 TV에서 상영되는 영화나 연속극에 의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장되는 것입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반드시 알아야 할 것,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고 평생토록 남편이 기억해야 할 것은 아내는 남편과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창2:24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라고 했고, 오늘 본문 31절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반드시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둘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편들이 아내를 하나의 파트너(Partner)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내는 동업자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아내를 좋은 짝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짝은 각각 다른 존재인데 합해진 경우입니다. 짝에는 두 개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는 좋은 짝이 아니라 내 몸입니다. 하나입니다. 결코 아내와 남편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 할 때부터 이미 결혼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내는 남편의 일부입니다.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지으셨습니다. 만일 아내가 파트너요, 짝에 불과하다면 얼마든지 버리고 다른 파트너, 다른 짝을 찾으면 됩니다. 오늘날 이혼율이 높은 이유가 아내를 자기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기인된 것입니다.

아내를 몸의 일부요, 한 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남편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본문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몸을 사랑합니까? 몸을 욕되게 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음 과식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욕되게 합니다.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은 몸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을 욕되게 하면 반드시 후유증이 심각해집니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내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아내를 무시하는 것 때문에 많은 아내들이 각종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결혼한 남자는 결코 혼자 사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에 아내를 동반해야 되고 아내를 배려해야합니다.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과 함께 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에 있어서, 혹은 남편 혼자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범사에 아내와 함께 해야 합니다. 아내는 집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가정은 남편이 잠자러 들어오는 기숙사가 아닙니다. 아내가 내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조금만 더 배려하시면 100점짜리가 됩니다. 부족한 2%를 채우시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오늘 본문24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죽기까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들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지, 남편을 위해 죽으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와 자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들이 최선을 다해놓고 마지막 순간, 즉 죽어야 될 순간에 죽지 아니해서 그 동안의 수고를 물거품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사망의 뜻도 있지만, 사실은 자기부인을 말합니다. 남편들이 자기를 부인함으로 아내를 사랑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의 구체적인 예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직장에 다닙니다. 열심히 일했음에도 승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 친척이라는 젊은 사람이 그 부서의 팀장으로 낙하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새파랗게 어린 상사, 나이도 10살이나 아래인 사람이 사장 친척이라는 이유로 부임을 하더니 날마다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모욕도 주고 그따위로 일하려면 당장 그만두라고 합니다. 속에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내가 이 회사 아니면 다닐 직장이 없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만둘 생각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천진난만한 애들과 아내가 반겨줍니다. 속도 모르고 우리 아빠 최고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참고 견딥니다. 자존심도 버리고, 창피함도 버리고, 다 버리고 나 죽었소! 합니다. 묵묵히 참고 직장을 다닙니다. 나 혼자 몸이라면 정말 당장 집어 치울 수 있지만 가족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예수님도 얼마든지 십자가를 집어 던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께 사람들은 침을 뱉었습니다.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욕을 퍼 부었습니다. 심지어 모든 옷을 벗기어 벌거숭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신 예수님은 이 모는 수치와 치욕 그리고 죽음까지도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감수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그러나 일부 남편들 가운데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끝까지 자기 자신을 던져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는 일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존심을 더 내 세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자기 자신을 황제로 대접받으라고 부추깁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고, 자기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나, 아내나, 자녀보다 자기가 더 우선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일이 잘 될 때는 가족도 생각하고 아내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하고 일이 힘들고, 괴로움이 오면 왜 나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느냐? 내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래서 요즈음 자살하는 남편들이 많고, 집을 나와 노숙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놓고 무책임하게 버리는가? 하면 너무 쉽게 이혼을 생각합니다.

사람 속에 거하는 죄는 희생하지 못하게 합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기 생각만 하게 합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고 했지만, 도움 받고 싶은 거지 근성을 발동시킵니다. 아담이 죄를 범 한 후 하나님께서 왜 죄를 지은 지었느냐고 물으니 하나님 당신이 내게 주신 여자인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줌으로 먹었다고, 하나님과 하와에게 그 책임을 돌렸습니다. 죄를 짓기 전 아담은 하와를 보자 "당신의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는 각종 핑계를 만들어 자기 합리화하게 합니다. 시대 탓, 환경 탓, 아내 탓, 심지어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합니다. 자기 잘못은 없습니다.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유혹과 자기연민을 이기지 못해서 남편의 의무인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마치 장애물로 취급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 여자 말고 다른 여자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이 문제 즉 죄의 유혹,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주님으로 모셔드리는 길 뿐입니다.

셋째. 좋은 모델이 없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술 먹고, 상 엎고, 소리 지르고, 아내를 때리는 남편, 아버지는 많이 보았는데 목숨 걸고 아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남편들을 보고 들은 적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도 좋은 남편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도 다 아내들을 많이 두었고, 위험한 순간에 아내를 보호하기 보다는 부인을 이용해 자기만 살아남으려는 비겁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좋은 남편의 예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보시고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가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고, 부족함에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누더기와 같고 언제라도 배신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주님을 부인하는 비열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29-30절에서는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했습니다. 왜냐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벧전3:7) 여러분의 아내가 체질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습니까? 성격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어 신경질적입니까? 아내의 약한 부분은 남편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면 약한 사람은 질병에 잘 걸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화를 내면서 병에게 욕을 하고 꾸지람을 합니까? 아닙니다. 침대에 편히 누워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합니다. 이럴 때 몸은 병을 이깁니다. 이와 같이 아내의 연약과 아픔을 내 몸이 아플 때와 같이 보호해 주고 치료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 교회를 사랑했다면 연약한 남편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남편들이 힘들고 남편 구실을 잘 하다가도 넘어 집니까? 그것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 힘이 빠지고, 진이 빠져 낙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를 받아 교회를 사랑하고 보호하셨듯이 남편들도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고 했습니다. 주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철야기도도 하셨습니다. 무시로 성령안서 기도했습니다. 남편 여러분이 기도할 때 가정이 삽니다. 아내가 삽니다. 자녀가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남편은 가정의 머리로서 하나님께 복을 받아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능력의 통로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