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업그레이드 신앙(1)

신앙을 업그레이드(Upgrade)하려면 (1. 기도하라)
본문/마7:7-11
지난 월요일 밤 전 제직이 모여 2005년 제직 연찬회를 가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표된 2006년 제일교회 목회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교회 요람을 만들어 여러분 모두에게 나눠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요람을 통해 알려드리기에 앞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담임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비전 즉 같은 소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같은 소망을 가지고 모두 한 방향으로 나갈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교회는 부흥되며 성도들의 삶은 윤택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우리교회의 4대 비전 (4U VISION)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⑴ Unity 10% 비전 - 과테 한인의 희망의 등불이 되며 복음 안에서 한인들이 하나(Unity) 되도록 섬기는 교회. 과테 한인의 10%를 제일교회로 (칭찬 듣는 온유한 교회 -행11:26)
⑵ Universal(열방) 비전 - 열방(Universal) 선교의 허브(hub)가 되는 교회(행13:1-3)
⑶ Under wood(언더우드) 비전 - 교회 교육의 내실화 와 기독교 학교 설립을 통해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미래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회.
⑷ Upgrade(향상) 비전 - 소외된 고국의 형제들의 삶이 질이 향상되도록(Upgrade) 섬기며 (행11;27-30), 우리 자신들의 삶도 그리스도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영육의 Upgrade하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이 4가지의 비전 가운데 가장 시급하게 이뤄야 할 것이 무엇인가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은 “업그레이드 신앙” 입니다. 즉 우리의 믿음을 좀 더 힘 있고 고상하며 아름답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해져서 어떤 시험과 환란이 와도 견딜 수 있으며 예수님 닮은 아름답고 고상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첫째 비결은 항상 기도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 박 모 집사님께서 미국에서 발행되는 빛과 사랑이란 월간지 약 10여권을 제 아내에게 주셨습니다. 그 중 2005년 1월 호에 실린 한 사람의 사연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미국에 한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23년 동안이나 해오던 식당사업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몸도 병들었습니다. 나이가 63세에 학벌도 국졸이 전부 거기에 몸까지 병들었으니 정말 그는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는 아무 희망도 없이 병실 한 구석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찬송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누가 저렇게 기쁜 찬송을 부르는가 싶어서 밖을 쳐다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쁜 찬송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한쪽 다리가 없는 청소부였던 것입니다. 청소부는 계속해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부릅니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이 찬송 소리를 듣는 그의 마음은 뭉클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청소부를 불러 "아니, 당신은 목발을 하고 있으면서도 어쩜 그리도 행복하게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겁니까?" 그러자 그 청소부는 "아저씨,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에요. 내 집은 저 하늘나라에 있어요. 그래서 지금 내 환경이 어려워도 나는 항상 즐겁게 살 수 있어요." "정말 하늘나라에 집이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 있어요. 나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요?" "하나님을 만나면 되지요." 그 청소부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퇴원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나이도 많은데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기도 중에 닭들이 날아가는 그런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그 그림이 자꾸 눈앞을 가려서 더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성도에게 왜 그런 지 물어보았더니 그 성도가 아주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합니다. "닭이 울기 전에 회개하라는 것이라네."그러나 그는 닭들이 날아가는 그 그림을 지워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 갈고 딲은 실력으로 손수 닭을 요리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는 힘을 얻어 미국 켄터키 주에 있는 자기 집에서 닭튀김 요리를 계속하게 되었고, 그의 닭튀김이 맛이 좋아 점점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됐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닭튀김 요리를 알리느라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요리한 치킨을 선전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 그의 치킨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갑니다. 마침내 그의 체인점이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나중에는 캐나다와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일단 치킨 사업에 성공하자 그는 수많은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많은 돈으로 후원했습니다. 그가 바로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의 창업자인 커널 할랜드 샌더스(Colonel Harland Sanders, 1890-1980)입니다.
그는 남들이 다 남은 인생을 포기하는 63세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는 그 나이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힘으로 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합니다. 이전에는 자기 경험으로 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로 합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닭튀김 장사를 하면 되겠다는 응답을 받아냈던 것입니다.그는 거의 평생 요식업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닭튀김이라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6세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했고 그래서 그는 어린 두 동생들을 돌보느라고 스스로 요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그는 이미 7세에 웬만한 요리를 다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0세 되던 해부터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청년시절에는 철도,소방, 보험외판, 타이어영업, 주유소 경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40세부터는 켄터키 주 코빈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그의 요리 솜씨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초에 그의 식당이 있던 코빈 지역을 가로질러 새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그는 자신의 식당사업을 경매에 넘겨야 했습니다. 그는 사회보장기금 105달러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닭튀김 요리에 대한 자신감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63세 노구에도 미국의 여러 도시를 순회하면서 자신의 치킨을 레스토랑 요리사들과 직원들에게 맛 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2년 만에 모두 600개의 치킨 체인점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는 내 몸이 그냥 녹슬어 없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몸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일하는 것을 원한다.' 그는 소원대로 정말 마지막까지 자기 몸을 불태우다가 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이 세상에는 1만 개가 넘는 치킨 점을 만들어놓고 또 수많은 교회를 세워놓고 저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지금 82개 국가에서 KFC 치킨은 애용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 노인으로 하여금 그토록 치열한 여생을 살도록 만들었습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무엇이 그 노인으로 하여금 그토록 심한 사업실패에서 다시 일어서도록 만들었습니까?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마7:7-11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했고, 렘33:3에서는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또 시50:15에서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까?
1.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과 입술에 주신 위력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언어를 주시고 말하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언어를 주시고 말을 하게 하신 하나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의 중요성과 그 위력에 관한 천지창조의 사역을 통하여 너무도 분명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전 세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의 첫날 "빛이 있으라 "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고, 계속 말씀하심으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셨고, 말씀으로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으며,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고, 말씀으로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에게도 말하는 기능을 주시고 그 말에 권능이 따르게 하셨습니다.
말이 있기 전에는 우리의 생각이 어둠과 혼돈을 면치 못합니다. 말과 더불어 우리의 생각에 빛이 나타나고 질서가 잡힙니다. 말은 현실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의 말에는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이 그의 인격과 삶에 미치는 영향과 그 결과 말의 중요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보면 언어중추신경이 모든 신경을 지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 말이 씨가 된다." 고 했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 잠언에서는 "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 (잠10:11) 생명의 샘이 되는 입도 있고 독을 머금고 있는 입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 (잠18:20,2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혀에 큰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베전3:10) 라고 했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약3:2) 고 했습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자기가 거하는 고치를 짓듯 사람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로 행복의 집, 불행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혀를 말을 어거하는 재갈과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작은 키와 큰 숲을 태우는 작은 불씨에 비유하면서 혀는 우리 지체 중, 작은 것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우리 생의 바퀴를 불사르고 지옥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약3:2∼6)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과 삶 그리고 나의 인생이 달라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혀는 배의 키와 같고, 우리의 입술과 말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내게 다시 돌아옵니다.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 비방, 저주, 더러운 말은, 그 악한 것이 다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말, 칭찬하는 말, 축복의 말도 나에게 그대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축복을 빌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주 자주 입술로 축복을 뿌리고 심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복이 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중 남을 헐뜯지 않습니다. 흉보지 않습니다. 기도 중에 욕을 하거나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는 언제나 희망입니다. 소망을 표현합니다. 기도는 나와 타인을 축복합니다. 기도는 멀리 봅니다. 기도는 감사를 표현합니다.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문제를 극복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 곁에는 천사가 그 기도를 실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할 때, 두 가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 다윗처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축복하는 입술, 감사하는 입술, 격려와 칭찬하는 입술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와 우리를 써달라는 기도입니다. 쓰임 받는 것이 축복입니다. 유능한 사람은 어디에서나 오라고 합니다.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고 논쟁합니다. 그러나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통치자이시며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그 시대의 영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쓰실 때 여러분의 삶을 책임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사업장을 쓰실 때, 여러분의 사업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경영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듯을 이루는 일에 나를 써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 기도입니다.
성경에 보니 제일 큰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요16:9),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롬14:23 )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습니다. (삼상12:23) 기도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큰 단점은 믿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음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훼방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도 방해합니다. 기도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씨를 뿌리는 자만이 가을에 추수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씨를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나중에 걷어 들일 것이 많은 것입니다.
기도 할 때 주의 할 점은,
첫째.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흙을 덮은 후 그냥 날 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기도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약1:6-8절에 보니 의심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으로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와 반대로 요15:7에 보니 무엇이든지 구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주께서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 믿으라’이지 ‘받으면 믿으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민23:19). 요일5:14-15절에도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시는 것을 안다면 들어 주실 것도 믿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꾸준히, 끝까지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구하여 주실 때 까지, 찾을 때 까지 그리고 열릴 때 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범하는 실수가 기도 한두 번 해보고 응답이 없으면 중단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주 목요일 본당 건축 허가를 받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힘이 들었지만, 계속 기도했습니다. 뇌물을 요구했지만, 뇌물을 바치는 대신에 기도했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인내하며 기도 한 결과 건축허가를 얻은 것입니다. 허가를 신청하고 2달 정도만에 받은 것은 기적입니다. 기본이 6개월이고 1년 심지어 2년 결려도 허가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도는 응답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도 할 땐 부르짖어 즉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렘33:3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고, 시34:15에서는“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또 시55:16에서는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데, 그 속에 간절한 마음을 담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을 지나가시는데,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부르짖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르짖는 기도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보좌를 흔듭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눅11:13에 보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모두를 향하여 친히 말씀하십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고상해 집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은혜롭습니다. 성령 받는 성도는 능력 있는 삶을 삽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각양의 은사로 사람들을 섬깁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신앙 생활이 재미있습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줍니다. 제일의 모든 성도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 아름답고 고상한 신앙생활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능력(3)

믿음의 능력(3. 기쁨의 원동력)
롬5:1-11
제가 영국에서 선교사역 중 하나님의 은혜로 버밍험 대학교 살리오크 칼리지에서 선교학 공부를 통해 저의 영적, 지식적 성장에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서 공부를 해야 했기에 월요일 아침 집을 출발해 점심때쯤 버밍험에 도착하여 학교에서 주는 밥을 먹고 오후부터 그 다음 날 오후까지 꼬박 하루를 그곳에 머물러 책과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세끼의 밥과 하루 동안 머무르는 기숙사비는 학교 측의 배려로 무료였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부는 타 문화권에 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전할 것인가? 를 주제로 다룬 Mission and Culture였습니다. 그때 교과과정 중 잠시 타문화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받은 책이 바로 선교사 단 리처드슨 (Dan Richardson)이 자신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쓴 화해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도네시아 이리얀 자야 섬의 사위 부족은 진정한 우호 관계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배반과 살인만이 그들이 따라야 할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와네스'라 불리우는 이 풍습은 배반을 사회적 의무로 여기는 아주 악한 풍습이었습니다. 다만 서로의 아이를 상대 마을에 '화해의 아이'로 주는 것을 통해서만 평화가 지켜질 수 있지만 그것도 열악한 기후와 비위생적 생활환경 속에서 그 유약한 아이의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리처드슨 부부가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 부족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진료를 해주는 섬김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변 부족들이 도움을 얻기 위해 이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 식인종 부족들 간에는 다툼과 살인이 끊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다툼과 살인을 보다 못한 선교사 부부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사위 부족은 밤샘 회의 끝에 다른 부족들과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선교사 부부에게 그곳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다른 부족들과 화해하기 위한 의식에 참석한 리처드슨 부부는 깜짝 놀랐다. 그들 식인종 부족의 화해 의식에는 그 부족 리더의 가장 사랑스런 막내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내주는 의식이 행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peace child'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리처드슨 부부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보내주신 'peace child'라는 사실을 전함으로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이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전쟁과 보복에 종지부를 찍는 화해의 사신이요, 화해의 제물 즉 화목제물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왔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목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예화를 통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숭의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김 동호 목사가 쓴 로마서 강해집 “예수만 의지하는 사람” 238페이지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이가 새총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폼을 잡아도 잡을 새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가 집에서 기르는 거위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험 삼아 한번 쏴 봤는데 아주 정통으로 맞아 그만 거위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거위를 쏴 죽인 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실수지 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귀히 여기는 거위지만 그 거위를 쏴 죽였다고 죄인으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서 죽은 거위를 마당에 파묻었습니다. 거위를 파묻은 것은 실수입니까, 죄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거위를 찾았습니다. 거위 못 봤니? 몰라요. 아이는 시침을 떼었습니다. 이것은 죄입니까? 큰 죄입니다. 이 죄가 즉시 아버지와의 화평을 깼습니다. 그 아이가 죄를 지어 놓고도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하면서 매달릴 수 있겠습니까? 슬금슬금 눈치보고 피해 다녔습니다. 가능하면 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와의 화평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렀어요. 아무개야! 왜요? 너 우물에 가서 물 좀 길어 와. 그것은 아주머니가 할 일인데 왜 날 시켜요? 너 거위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아주머니가 거위 파묻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그 약점을 이용해서 아이에게 추운 겨울날 우물가에 물을 길러 보냈습니다. 아이는 물을 길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아이 부모가 없으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러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시키고 자기는 앉아서 쉬었습니다. 아이는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습니다. 죄의 약점을 잡히면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종이 됩니다. 주인집 아들이 일하는 아주머니의 종이 된 꼴입니다. 죄는 종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일을 시켜야 할 종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는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아이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사실은 제가 거위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서 파묻고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야, 이놈아 다 알고 있었다. 아빠가 거위를 귀히 여기지만 거위가 중하냐? 네가 중하냐?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숨기면 그렇게 고통스럽단다. 너 아주 좋은 공부했다. 죄를 숨기니 힘들었지? 다시는 그러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202장) 이 찬송을 그 아이는 다 깨달았을 겁니다. 죄에서 자유 함을 얻은 후 그렇게 무겁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찬송가 183장) 아주 기쁘고 자유스러워서 아버지에게 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또 심부름을 시킨단 말입니다. 물 떠오너라! 떠오겠어요, 안 떠오겠어요? 너, 말 안 들으면 알지? 하고 협박해도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1.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조성한다.
여기서 화평이란 곧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 했는데, ‘들어감’은 첫째. 왕(어전) 앞에 안내를 받아 들어간다는 뜻과 둘째 배가 항구에 입항 할 때, 예인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천국이라는 항구로 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인선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화물을 가득 실은 큰 배가 항구 앞에 이르면 일단 엔진을 끄고 멈추어 섭니다. 이때 항구에서 작은 예인선이 나갑니다. 큰 화물선과 작은 예인선 사이에는 굵은 밧줄이 연결되어 작은 배가 끌고 들어와 항구에 정박시킵니다. 과연 이 작은 배가 큰 화물선을 끌 수 있을까? 의아해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인선은 규모는 작아도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있는 특수한 배입니다. 예수님도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화해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인도되어 그 하나님을 대면하고 서서 화평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평의 복의 효력은 어디까지 미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하나님과 하평의 복이 오직 천국에서만 발휘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은 미래적 차원이 포함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현재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지금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기쁨 즉 즐거움을 가지고 온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기쁨을 샘솟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3)고 했습니다.
2. 믿음은 기쁨을 창조한다.
본문2절에“"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하는 즐거움과 둘째는 영원한 천국 즉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는 즐거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현재적 영광과 미래적 영광이 있습니다. 현재적 영광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면서 사는 즐거움이고 미래적 영광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즐기는 즐거움은 임마누엘의 기쁨이고, 천국에서의 기쁨은 여호와 이래의 기쁨입니다.
3. 현재적 영광을 누리며 기뻐하라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은 '함께' '마누'는 '우리''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의 삶을 누리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줍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4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안에 들어와 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이 권세는 첫째. 생명을 살리는 권세입니다.
요5:21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들의 권세를 받으면 영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이 살게 됩니다. 또 롬8:1에서는"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생명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입을 열어 말씀을 증거 할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자는 영혼이 깨어나고 병든 영혼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둘째. 맺고 푸는 축복의 권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적 권세, 그것은 무엇입니까? 마16장에 보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마16:19에 보면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는데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맺고 푸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복을 비는 축복권입니다. 축복의 반대는 저주입니다. 저주는 남이 잘 안 되길 비는 것입니다. 마귀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반면에 축복은 말 그대로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영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은 이 축복권을 사용해서 세상을 구원하고 복되게 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이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런 축복을 해서 복을 받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B.C.605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1차 예루살렘 침공 때 어린 청소년 시기에 포로로 끌려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기위해 왕이 하사하는 이방신에게 바친 제물로 쓰였던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마다하고, 채식을 하였습니다.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금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다가 풀무불속에 들어가는 고난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루에 3번씩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고, 그래서 사자굴속에 던져지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7명의 왕을 거치며 5번이나 국무총리를 지냈던 다니엘은 신앙과 세상 지위 모두를 공유하면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그가 단9장에 보니 성경을 읽다가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며 금식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자 그의 기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셋째. 모든 환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권세입니다.
본문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환난은 육체적인 고통이요, 물질적인 어려움이며, 사회의 냉대와 같은 어려움입니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앞에 곤고합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이제는 끝이라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요셉처럼 다양한 인생 경험과 고난을 당한 사람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역경을 상징이라도 하듯 그는 신분이 바뀔 때마다 옷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4번이나 인생의 옷을 바꾸어 입었던 사람입니다. 채색옷, 종의 옷, 죄수복, 총리의 옷까지 참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⑴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아 위로 형들이 입어보지 못한 색동옷을 입었으나, 형들의 미움으로 색동옷이 벗겨지고 종의 옷을 입어야 했고, ⑵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종의 옷이 벗겨지고 죄수의 옷을 입어야 했으며, ⑶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수의 옷이 벗겨지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화려한 관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채색 옷은 아버지가 입혀 주셨고, 종의 옷은 보디발이, 죄수의 옷은 보디발의 아내가, 총리의 옷은 바로 왕이 입혀 주었습니다. 참으로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미움 받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귀한 집 아들에서 종이 되었기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종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었기에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당시 세계 최고의 나라인 애굽의 제2인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꿈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올라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판,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했습니다. 섬겼습니다. 왜요, 자기가 당해보니 너무 힘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해 본 사람이 가난한 사람 사정을 압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을 당하시고 계십니까? 성도의 고통은 고통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난으로부터 해방과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잠시 경험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잠간의 고난 후 주님은 반드시 부활의 능력으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현재 고난 중이 있는 형제자매 친구 이웃을 섬기도록 복을 주십니다.
어떤 부인이 동네에 채소가게를 열었습니다. 가게가 너무 잘 돼서 사람들이 시기합니다. 하루는 남편이 와서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나 잘 돼서 다른 가게가 망하게 생겼소. 그러니 더 이상 가게 확장도 하지 말고 물건도 더 들여 놓지 말고 우리 가게에 없는 것은 다른 가게에 소개를 합시다."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가게가 한가해 지자,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 남는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쓴 글이 바로 삼포능자(미우라 아야꼬)의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며 수 백 만부가 팔려 나갔고 이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욕심을 부렸다면, 돈을 많이 벌어도 슈퍼마켓 주인밖에 더 하겠습니까?
4. 미래적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은혜요, 즐거움입니다. 섬기고 사랑하며 꾸어주어도 잘 되는 복, 이 복을 누리며 살라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은 구체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살 수 있도록 주신 은혜 앞에 감사하며 또 다른 하나는 마치 농부가 봄에 심은 곡식을 모두 추수해서 창고에 들인 후 축제를 벌이듯이 이 땅에서 우리의 일생을 마치면 영원한 천국 창고에 알곡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며 벌이는 축제가 곧 추수감사주일인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하는 곳입니다.(눅16:9) 대접받고 위로받는 곳입니다.(눅6:21) 특별히 계시록 21장에 보니
⑴ 천국의 건축 재료는?,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등 각종 보석으로 지어졌고,
⑵ 그 길은?,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더라”(계21:21),
⑶ 정원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⑷ 천국 생활은?
① 세상적인 제약과 속박이 없는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② 더 이상 저주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22:3) ③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④ 천국은 상급을 누리며 사는 곳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핍박받고 헐벗고 고난당하며 불이익을 당한 모든 것을 보상받는 곳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렇게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믿는 믿음, 이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능력(2)

믿음의 능력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
본문/롬4:1-25
현대인들은 과학적 합리적 사고에 영향을 받아 과학적으로 증명 된 것, 역사적인 것,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만을 인정하고 믿으려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고 하여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이는 하나님은 믿을 가치가 없고,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자이고 속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일5:10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 고 했습니다. 이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의 약속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은 없다." 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컨대, 여러분들이 저에게 "이름이 뭐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두식" 이라고 제가 말했을 때, 여러분이 가볍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못 믿겠어요." 그러면 저는 여러분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바라 볼 것입니다. 그런 후, "어디에 삽니까?" 라고 묻자 “과테말라에 삽니다.” 라고 제가 대답 했을 때, "그것도 믿지 못하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저는 아마도 매우 화가 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자신이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판단이 되면,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님께 한번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거부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끼실 모욕감을 생각해 보셨습니까?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진노가 임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의로워지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믿음을 통해서 평강과 안식을 얻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1. 믿음이란 무엇인가?믿음이라 함은 히브리 말로 ‘에문’인데 이 말은 ‘아멘’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말은‘참, 진실, 확신, 과연 그러하다는 응답, 안정, 견고’등을 의미합니다.
신약의 헬라말로 ‘피스티스’인데 ‘신실, 충실, 안정, 견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일반적인 뜻은 나를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 즉 누구를 믿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컨데, 부실한 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강한 믿음을 갖는다 해도 모든 돈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실한 은행에 예금한다면, 약한 믿음으로 맡긴다 해도 그것은 아주 안전합니다. 돈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어떤 은행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미쁘시사 믿는 자를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첫째. 평안을 가져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믿지 못하면 불안 합니다. 초조합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운전기사를 믿지 못할 때 차 안에 앉아 있는 동안 평안히 여행 할 수 없습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중에도 가스렌지나 가스통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없으면 마음대로 이를 사용하여 요리할 수 없습니다. 요리하면서도 불안합니다. 차에 타서 코를 골면서 잘 수 있는 것은 운전기사가 안전운행을 해서 내가 가려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평안 가운데 한 평생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담대하고 견고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는 가운데 뭔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매우 망설여집니다. 뭔가를 하면서도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겁이 나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믿음 즉 확신이 있을 때, 담대하게 일을 추진 할 수 있습니다. 막4:40에 보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믿음의 대상과 바른 관계를 유지시켜 줍니다.
인간관계는 믿음의 관계이고 믿음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사실 믿음이 없이는 물 한 잔, 밥 한 그릇,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아프면 약을 사 먹을 수도 없고 의사에게 내 몸을 믿고 맡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고, 아내가 남편을 믿고, 이웃과 이웃, 친구와 친구, 스승과 제자, 나라와 백성, 이 모든 관계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바른 관계가 성립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자연적인 믿음과 초자연적인 믿음이 믿음에는 자연적인 믿음과 초자연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믿음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자연적인 믿음 즉 일반적인 믿음은 사람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간 상호간의 믿음을 말합니다. 서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빵집에서 파는 빵에 독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어떤 사람과 12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으면 그 사람이 그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올 것이라는 믿음등과 같은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신뢰합니다. 일기 예보를 믿거나, 신문을 믿거나, 비행기를 탈 때 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조종사에게 우리의 목숨을 맡깁니다. 우리는 역사책을 신뢰하고, 의학책을 그리고 승강기를 신뢰합니다. 하지만 비행기와 승강기는 때로 추락하기도 하고, 역사책은 정확치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믿음으로는 인생의 근본문제인 영혼의 구원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믿음, 일반적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정확하고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믿음, 결코 실망시키거나 믿는 사람에게 낭패를 가져오지 않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특별한 믿음 즉 초자연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초자연적인 믿음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믿음입니다. ⑴ 초자연적인 믿음의 근원아무리 큰 강 물줄기이라도 그 근원은 깊은 산골짜기의 작은 냇물이거나, 샘에서 솟는 물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이처럼 귀한 믿음도 근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근원은 첫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둘째.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롬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셋째. 믿음의 근원은 성령님이십니다. (고전12: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믿음이 생성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로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⑵ 초자연적인 믿음의 내용이 초자연적인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고백하였던 사도신경입니다. ① 전능하신 하나님 ② 동정녀로 탄생하신 예수 ③십자가 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④ 부활 승천 다시 오실 예수 ⑤ 성령의 교통, 교회, 영생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바울의 믿음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 속에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믿음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었던 아브라함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다듬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여기 모인 저와 여러분 모두를 아브라함과 같이 변화시켜 이시대의 아브라함으로 살게해 주신다는 약속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고 했고, 23-24에서도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이 받은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와 복
⑴ 죄를 가리우심을 받아 의인이라 인정받음이 세상에서 죄로부터 자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그 또한 연약한 죄인임이 분명합니다. 본문2-3절에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 6-8절에 보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은 시편32편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밧세바라는 여인과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죽이는 큰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하자 너그러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다윗의 죄가 가리워진 것입니다. 이 32편은 다윗이 큰 죄를 용서받은 즉 덮어진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서 지은 시입니다. 여기서 덮어준다는 말은 가리워 준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는 있지만, 없는 것 같이 취급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속죄란 히브리어로 카팔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덮어준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지성소를 시은좌, 즉 은혜를 받는 곳이라는 뜻이며, 특별히 이 법궤의 덮개를 속죄소 라고 합니다. 죄를 덮어서 죄가 보이지 않게 한 후 용서해 주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의 속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4:8에서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왜 기독교가 복되고 기쁜 복음의 종교입니까? 그것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용서 즉 사함을 받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제사장이 속죄소 위에 양의 피를 부음으로 그 피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덮어 보이지 않게 한 것처럼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는 은혜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이 은혜를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⑵ 의인됨의 중요성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죄가 덮어지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롬5:10)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사람인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화평,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으며, 히4:16에서는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각양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아시다 시피 인간관계에서도 화목, 즉 화평이 없으면 절대 안식이 오지 않습니다. 만약 부부관계에서 화평이 깨지면 급기야 갈라 설 수밖에 없고, 회사도, 나라도, 교회도 화평이 깨지면 은혜와 능력이 사라지고 시험에 듭니다. 이 화평을 가져오는 원동력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롬5:1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누리자’는 말은 즐기자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화평의 복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⑶ 화평의 복을 누리라
① 복을 구하라
아무리 좋은 집이 있어도 들어가 살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며,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어도 먹어야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을 구하고 받아 누릴 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 100여 년 전 미국에서 최고로 구두쇠로 꼽히는 히티 그린이라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독자 하나를 두었는데, 다리에 병이 나서 수술을 해야 함에도 수술을 하지 않아 결국 한쪽 달리를 짤라내고 평생 절뚝발이로 살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죽으로 연명했으며,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은 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보니 통장에 1억 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100년 전 1억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통장에 1억불 아니 100억 불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11일) 판 한과정보에도 실린 기사로서 원래는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 신문 11월 10일에 실린 내용입니다. 그 제목은 “Judge gives miser's millions to charity” 입니다. 루이스 스미스라는 기자의 기고에 의하면 평생 자식들 보다 돈을 더 사랑했던 수전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옷은 항상 남이 입다 못 입는 헌옷을 사서 입히고, 생일 선물도 중고품 가게에서 사다 주면서(They were all brought up in second-hand clothes and got second-hand birthday presents) 평생 모은 돈 400만 파운드(한화 약 80억)가 자식들에겐 한 푼도 돌아가지 않고 모두 자선단체에 강제로 기부하라는 법원의 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이 수전노의 이름은 레지라드 하워드인데, 지난 99년 90세의 일기로 죽으면서 자신이 평생 모은 이 돈과 골동품을 자신의 이름을 딴 박물관을 만들어 달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유품을 전리하며 하워드가 평생 모은 골동품은 영화 치티치티 방방에 쓰였던 소품 자동차와 그 외 한 두 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잡동사니에 불과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박물관을 세우고 싶어도 전시 할 물품이 없자 3명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유서가 실현 불가능함으로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할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으나, 법원은 아버지가 박물관을 세워달라는 것은 곧 이 돈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뜻이 있다고 봐야 함으로 400만 파운드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이 옳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현재 이 세 자녀들은 성장과정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해 정부 보조금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에 자녀들은 “평생 단 한푼에 벌벌 떨었던 아버지가 전 재산이 자선단체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올 것”(He’d be turning in his grave if he knew that all his money went to charity)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린 할머니와 하워드 할아버지를 비난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난 부요가 있고 구하기만 하면 어마 어마한 은혜를 누릴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해, 나는 가진게 없어, 나는 무능해’한다면 앞에서 말한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농협 쌀 창고에서 생쥐가 굶어 죽었다면 이는 생쥐 책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16:17-18을 통해 믿음으로 구하고 받아 누리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사실을 믿고 지금부터라도 믿음으로 선포하고, 구하여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라
본문17-21에 보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얼마든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사라가 나이 많아 석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과 사라를 통해 자녀를 낳게 하실 것을 믿었고, 100세 때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 가운데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바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시자, 주저 없이 그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죽은 자를 다시 살리 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기나 암은 똑같습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성경 말씀과 같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즉 우리의 믿는 바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는 은혜를 이 땅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의 능력(1)

믿음의 능력
롬3:21-31

여러분 엔테베 작전이란 말 들어 보셨는지요? 한때 꾀나 유행했던 말이었는데, 이 엔테베 작전이 생겨난 배경은 이렇습니다. 1976년 6월27일, 그리스 아테네 공항을 떠난 에어 프랑스 비행기가 아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서 공중납치(hijacking)를 당했습니다. 이 비행기 안에는 102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곧 인질로 잡혔습니다. 이 비행기는 당시에 이디 아민이 통치하고 있던 우간다의 수도 공항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이에 당시 라빈 수상이 이끌고 있던 이스라엘에서는 즉각적으로 긴급 내각 회의를 열어 비밀스럽고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당시 30세의 요나단 네탄야후 대령이 이끄는 특별 작전 요원들이 6대의 비행기에 분승하고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네 대의 화물 비행기, 두 대의 보잉 707 비행기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한 대에 주로 전투 요원들이 탔고 나머지 비행기들은 부상자들의 치료 및 후송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그들은 레이다망을 피하기 위해서 저공비행을 해서 우간다의 수도 공항에 안착 후 불과 15분~20분 내에 모든 작전은 끝났습니다. 인질들을 구출하고, 이들은 유유히 이스라엘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세 명의 인질이 희생되고 작전 요원 한 사람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이 작전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구출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 작전은 이 엔테베 작전보다 더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 성자이신 독생자 예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에 얽매여 있는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 작전은 완벽하게 적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었습니다. 마귀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즉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죽으시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구원의 세계, 축복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에게만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니 두 남편을 죽이고 친 어머니 친 동생마저 눈을 멀게 해서 보험금을 타낸 엽기적인 한 여자가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성경에도 보니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반역하여 죽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내, 남편, 아들, 딸마저 나에게 등을 돌린 세상, 이런 세상에서 누구를 믿을 수가 있겠으며 또 누구에게 자기의 구원을 호소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지만 신뢰할 대상은 아닙니다. 고난의 폭풍우 속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나를 붙드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오직 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논하며 나의 모든 것을 털어 놓고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분이 베푸신 은혜의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분의 자녀가 되고, 이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사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소유 할 때, 우리의 삶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유는 이 믿음 속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큰 선물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⑴ 칭의(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능력
본문23-26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죄를 간과하셨다”는 말은 죄가 많지만 없는 것처럼 넘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셔서 그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많은 인간이지만,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죄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가리우심을 받아서 그 죄를 하나님이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⑵ 선물로 받은 구원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롬3:27-28) 우리의 믿음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엡 2:8,9).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므로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믿음 자체를 공로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무엇인가 자랑할 것이 있도록 만드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불하신 모든 대가를 감사함으로 받고 기쁨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⑶ 차별이 없는 구원모든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주시는 구속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의 행위' 외에 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추구하였던 유대적 종교의 한계를 벗어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의미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⑷ 전인적인 구원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만 구원하려고 온 것만도 아니요, 그렇다고 인간의 육신적인 질병만을 고쳐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구원하고 치료하는 전인적인 구원이 목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는 인간의 삶 속에 풍성한 공급을 주실 뿐만 아니라(요 10:10)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병들어 버린 영혼과 마음과 육체까지도 온전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의 치유 사역을 행하실 때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죄 사함의 선포를 하시었고 뿐만 아니라 다시는 가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죄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눅 5:20; 요 8:11).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는 인간을 온전하게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2. 율법을 굳게 세우는 능력

⑴ 율법이란
율법은 장차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히10:1) 모세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율법시대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교훈과 의식속에서 날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제사를 드리며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행동 규범 이었습니다.

⑵ 율법의 존재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첫째. 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율법을 다 지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오직 이분만이 모든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지키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롬3:20) 그리고 세 번째로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갈3:24) 왜냐면 율법을 지켜 구원받아 보겠다고 노력 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⑶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마5:16) 그 율법은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믿음은 율법 즉 행위를 굳게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가 안 믿기 때문에 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주일날 하루를 일하지 않고 안식을 누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먹여주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주일 성수라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내의 행복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남편에게 순종하는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라는 행위를 계속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더라도 다시 살리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아질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행위가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근거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힘 있고 능력 있게 만듭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천입니다.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굳게 세우는 일을 합니다.
3. 믿음은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목 제물로서 모든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죄의 장벽,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혈통 장벽, 문명국과 미개국 사이의 문화 장벽, 남여사이에 있는 성적 장벽, 어른과 아이 사이에 있는 나이장벽까지 모든 것을 허무시고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화목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교회, 믿음이 있는 교회는 화목한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가 화목한 교회입니까?


⑴ 가족 같은 교회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관계가 바로 가족임을 역설합니다. 예컨대 갈6;10에 "착한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해야한다"고 했을 때 믿음의 '가정'이란 말이'가족'(family)이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엡2:19에는 "너희가 더 이상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또 딤전3:15에서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집은 영어로 Household of God, 즉 ‘하나님의 가족’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만날 때 가족임을 느끼느냐? 하는 점입니다.


⑵ 바른 '코이노니아'가 있는 교회
코이노니아는 삶의 나눔, 삶의 참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코이노나아가 이뤄 지려면 자기의 삶을 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 자기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교제가 우리에게 치유와 위로, 격려 더 나아가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되고 역동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활 즉 신약 성경적 코이노니아를 드러내 보일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그 교회 된 기능을 발휘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속적인 세상에 성공적으로 침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힘이 바로 이 교제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⑶ 형제의 연약함을 용납하는 교회
건강한 가족은 상처주지 않는 관계가 아니라, 상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작은 위기에도 무너지지만 나눔의 사랑은 크고 깊은 뿌리를 내립니다. 가족은 기쁨과 믿음과 사랑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고 미워하다가 화해하고 용서하고 상처까지 끌어안아야 비로소 가족인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바로 형제와 이웃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연습을 하며, 서로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화목한 교회가 되려면 큰 그룹으로 모여서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창립 6년 만에 구역 예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구역 예배는 이전에 드렸던 구역 예배 와는 좀 다른 차원에서 운영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구역 모임에는 예배, 성경공부, 기도, 찬양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구역 모임의 본질이 아닙니다. 구역 모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구역 모임의 본질은 화목 즉 하나 되는 것입니다. 혈통을 나눈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정과 사랑이 있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복, 즉 믿음의 위력은 죄인을 의롭게 만듭니다. 내 죄가 하나님 앞에 가려지는 복을 받고, 전인적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율법을 굳게 세워 자신 있게 행동하도록 돕는 복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서로 서로를 용납하고 하나 되고 화목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 되어 승리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6) - 엘 벧엘 그 후의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 이후
본문/창35:9-15

미 동부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자리 잡은 예일 대학은 1974년 이후 네 명의 대통령, 38대 제럴드 포드, 41대 조지 부시, 42대 빌 클린턴, 43대 조지 W. 부시를 배출했습니다. 조지 W 부시의 선거전을 치렀던 민주당 캐리도 예일대 출신입니다. 부시는 68학번, 캐리는 66학번입니다. 이와 같이 예일대가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원동력에 대해 리처드 레빈 총장은 “학생들이 하나의 팀에나 조직에 소속되거나, 리더가 되어 공통된 목표를 향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특히 개교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인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신성하게 여기는 교풍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예일대 1학년이 머무는 올드 캠퍼스에는 미 독립전쟁 당시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는 말을 남기고 영국군에게 처형된 나단 헤일의 동상을 아침마다 보며 교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처럼 예일대는 개인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을 증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는 문화가 있고, 특히 교수와 선배들은 학생들에게“너희들은 지금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이 결코 공짜라고 여기지 말아라, 언젠가 너희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을 사회와 국가에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년에 4만 불 이상 학비를 내는 학생들은 취업박람회에서 모든 좋은 일자리를 뒤로한 채 평화봉사단, 해외 교육 봉사단의 부스 앞에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자라고 공부했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선천적인 특징에 의해 지배받기 보다는 후천적인 환경 즉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 그리고 신앙교육에 의해 고쳐지고 발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르시며 가르치고 지도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당신의 택함 받은 자녀들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마귀의 자녀, 욕심으로 가득 차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들을 괴롭게 한 야곱에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시는가를 알기위해 지난 5주간에 걸쳐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제하에 야곱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은 야곱의 노년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약 5단계에 걸쳐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기복적 신앙의 단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단계입니다. 이때의 모습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아서 젖을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우는 행위가 생존 수단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소원 성취가 삶의 전부이며 하나님을 찾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활히 이루어 주시는 공급원으로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성령 충만한 것같이 보이나 뜻대로 안되면 금방 좌절합니다. 육적인 본능으로 살아가며, 자기 욕심을 채워 달라고 성경도 이에 관계된 것만 골라서 붙잡는 이기적인 신자입니다. 이 단계는 영적 성숙 단계에서 제일 낮은 수준으로서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성도의 약 7-80%는 이 단계에 머무르고 있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거의 감당하지 못합니다. 야곱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팥죽을 통해 형의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의 야곱입니다.
둘째 단계는 율법 신앙의 단계입니다. 이는 종교의 틀에 매여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 비유하면 이유식을 먹는 단계로서 주님을 좀더 알고픈 마음이 생기고 또 세상에 대한 열심을 바꾸어 종종 교회 일에도 참여합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니 자신이 성스러워졌다는 기분이 들고, 주워들은 영적 지식을 진정한 자신의 영적 수준으로 착각합니다. 또 선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기도 하고 봉사를 통해 자신의 선행을 쌓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빙자하여 타인을 판단하는 일을 자주합니다. 의인인채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규율이 절대 기준에 모든 사람이 따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거기에 동의하셔야만 된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이 시기의 성도들은 자기가 만든 법에 억매여 자유함을 잃고 율법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특히 자신이 토해낸 판단, 타인을 향해 쏘아댄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 올 때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핑계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이 빠져 사방의 모든 길이 캄캄하게 막히는 답답함을 경험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며 자신의 의를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왕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사모합니다. 야곱의 경우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께 서원하고 밧단아람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굳게 약속합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겠으며, 벧엘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동안 밧단 아람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몰랐습니다. 삼촌이 잘못했고, 삼촌의 자식들 즉 외사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삼촌을 피해 도망 쳤고,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보호를 받았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보호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단계는 십자가 신앙 단계입니다. 이는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갈2:20. 갈5:24)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의 의를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살아왔던 고집이 쉽사리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열심의 대상은 세상일에서 주님의 일로 바뀌었지만 일을 하는 동기는 여전히 자기만족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든 나만 좋으면 좋은 것이고, 여전히 자기 고집이 살아있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 우리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인한 쓴잔을 실컷 마시도록 잠시 내버려두십니다. 이런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던 것, 붙들던 것, 믿고 사랑했던 것 들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몸부림치는 와중에서 남의 잘못만 보던 중심이 변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허물과 부족이 십자가 밑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큰 잘못도 내 잘못에 비하면 작게 보이며,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피부로 느껴집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언어,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하는 동기가 달라집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나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지 않고 남을 위한 배려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 주님의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자신을 죽이지 못해 조금만 한 눈을 팔게 되면 다시 2단계로 떨어 질 수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환도 뼈가 부러진 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깨달아 졌습니다. 그래서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붙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에서와 화해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본래 야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잊은 채 세겜에서 땅을 사고 그곳에서 자기 맘대로 예배를 드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넷째 단계는 헌신의 신앙 단계입니다. 성숙을 이루는 순종의 단계이며, 하나님께 아낌없이 자신을 드리는 단계입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많은 연단의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지고 순간순간 사랑의 고백,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양심이 밝아져 깨달은 말씀은 당장에 실행에 옮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간사한 것이 인간인지라 좋은 것도 계속되면 무디어 지고 둔감해 집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느꼈던 감격의 순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되고 흥미가 없어진다. 다시금 안일에 빠져 영적 침체 위기가 찾아듭니다. 이때 디나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단계인 ‘자아의 죽음’때, 즉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죽음의 위기를 맛보았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이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체질을 바꾸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 한도 내에서 죄에 물든 습관들을 하나님께 속한 성품으로 바꾸도록 도우십니다. 세겜에서 디나의 사건을 통해 벧엘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야곱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도록 사면의 고을들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 지금까지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기 욕심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예배도 드렸으나, 이번 만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고 몸을 성결케하고 벧엘로 올라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올라간 것입니다.
다섯째. 연합의 단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단계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단계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단계입니다. 수많은 연단과 인내를 통해 이제는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삶의 전부가 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른 성도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덕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자신의 가치를 부각하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함께 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불평의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충성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이적과 감동적인 일이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이웃과 형제들을 축복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기쁘게 감당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스라엘의 삶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택함을 받았고, 우리가 이스라엘로 살도록 지도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에 보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상고하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벧엘에서 약속을 지킨 이후에야 비로소 밧단아람에서 돌아 온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벧엘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기 전 까지는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정한 이스라엘의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이스라엘로 기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창35:27에 야곱이 드디어 기럇 아르바 즉 헤브론에 이르러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정착한 곳이요, 이를 아버지 이삭이 물려받은 곳입니다. 야곱이 그곳에 도착 한 후 얼마 지니자 않아 아버지 이삭은 돌아가시고 그리고 지금까지 아버지 옆에 살던 에서는 야곱이 오자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나 에돔 즉 세일산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원했던 장자가 된 것입니다. 이 장자의 삶은 곧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고 그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왕처럼, 선지자처럼 그리고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즉 장자다운 삶은,
⑴ 자기 생각과 고집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모두가 은혜 받고 변화되어도 여전히 한두 가지 문제를 안고 삽니다. 야곱 또한 이스라엘 되는 은혜를 받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인간적 욕망과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에 비해 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을 입혔고, 이 일을 통해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갔고, 야곱은 이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러 보낼 때에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혹시 죽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42:4) 그러나 첫 번째 사온 곡식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자식들의 요구를 거절치 못하고 결국 베냐민을 애굽으로 형들과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라고 고백합니다.이뿐 아니라 창46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자 고향을 등진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야곱의 지금까지의 삶을 살펴보면 야곱은 항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이동하고 정착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 가운데, “잃으면 잃으리로다”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던 단어입니다. 양보, 희생은 야곱의 사전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임을 볼 때, 이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모두는 곧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 베냐민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표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결정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보호와 인도를 받는 첩경은 순종입니다.
⑵ 온전히 예배하는 삶입니다.(제사장적 삶)
창세기 45장 28절, 즉 마지막 절에 보면“이스라엘이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이 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살아있고 더군다나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인 애굽의 제 2인자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소식을 들은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창46:1에“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 은혜를 베푸시면 마지못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때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와 기쁨의 소식을 들은 후 먼저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 예배를 받으신 주님께서 나타나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창46: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인 예배하는 자,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예배 자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르십니다. ⑶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삶입니다.(선지자 적인 삶)야곱은 언제나 욕심 부리고 심통 부리며 자기 맘대로 살다보니 판단력이 부족해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노년을 달랐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이 나이가 많아 어두웠으나(창48:10),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 할 때, 차자인 에브라임 위에 야곱이 오른손을 얹어 기도하려 하자 요셉이 아버지가 눈이 멀어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올려 안수하려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셉 지파는 원래 하나의 지파였으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즉 두개의 지파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은 것이며(창48:22), 실제로는 12지파 중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로서 12지파 중에서 제외되자 그 빈 자리를 요셉지파 중 에브라임이 채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는 오직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 왔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복을 원했으나,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뿐아니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난안 땅에 다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창48:21) 그렇습니다. 성도가 복을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 성도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말이 있고, 천국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리는 전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⑷ 타인을 축복하는 삶입니다. (왕적인 삶)
창47:7에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매”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약자입니다. 바로는 그 나라의 통치자입니다. 대개 약자가 강자앞에 서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히려 당당히 바로를 축복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그 앞에 일곱 번 절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는 에서보다 몇 배나 더한 권력과 힘을 가진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 즉 이 세상을 축복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야곱은 항상 주는 자의 삶이 아니라 받는 자, 빼앗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변화된 이스라엘은 주는 자 베푸는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는 자 베푸는 자 축복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품고 비젼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하나님을 닮은 멋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원하신다면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됩니다. 나 혼자하면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쉽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어쩌면 저와 그렇게도 같은지... 그런데 나중에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했고, 상상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고, 거기에 자식까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일어나라! 힘 내라! 내가 너를 도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방법은 하나님의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그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나에게도 이런 기적과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5) - 엘벧엘의 하나님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5.엘 벧엘의 하나님)
본문 / 창48:15-16. 창35:1-15

저는 결혼 후 약 12년간 한국에 살았습니다. 3년은 부 교역자로 그리고 9년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 12년 동안 이사를 무려 18-19회 정도 했습니다. 수 없이 많이 해서 그 수를 정확히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해 3번 이사 한 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가까운 형제나 친구의 죽음이고, 그 둘째가 이혼이며 셋째가 이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1년에 한번도 아닌 두 세 번씩 했으니, 아내가 도망가지 않고 곁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이사를 할 때 마다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 하고 싶어도 염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을 표현할까 싶어 고민하고 있던 중 아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장인어른의 유품인 족자 한점과 아직 표구하지 못한 서예 작품 두 점이었습니다. 장인께서는 장기간 당뇨로 고생하시면서 이를 이기시기 위해 서예를 하셨습니다. 일본에 가셔서 전시회를 여실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셨던 분입니다. 오랜 병상에서 많은 유산을 남겨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신 장인께서는 모든 자녀들에게 당신의 작품 한두 점씩 유산 대신 남겨 주셨고, 아내도 이를 매우 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내인지라 결혼 후 1년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매우 그리워했고, 그래서 아버지께서 유품으로 남기신 그 작품을 귀하여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사를 시작할 때면 언제나 이 족자와 아직 표구하지 못한 나머지 작품들을 제일 먼저 챙겨서 안전한 곳에 두곤 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사랑한다는 저의 마음을 전하는 표시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작품 중에 특히 제가 좋아했던 것은 春(춘)不(불)耕(경)種(종)秋(추)後(후)悔(회) 즉 봄에 종자를 갈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 는 글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매우 연약합니다. 그래서 후회를 잘 합니다. 중국의 주자는 뒤늦게 후회하지 말라는 뜻에서 주자 10회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不(불)孝(효)父(부)母(모)死(사)後(후)悔(회) -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 少(소)不(불)勤(근)學(학)老(노)後(후)悔(회) -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安(안)不(불)思(사)難(난)敗(패)後(후)悔(회) -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 치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이뿐 아니라 사람은 불편을 느껴야 변화를 추구하고 발전을 꾀합니다. 인간이 발견한 모든 발명품은 불편을 느끼는 순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밭 갈고 논을 갈 때 사람이 직접 멍에를 메고 갈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말과 소를 훈련시켜 밭을 갈아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소나 말에게 멍에를 씌워 짐을 땅 바닦에 질질 끌고 다니게 해서 운반을 했습니다. 처음엔 좋았는데, 소가 힘들어 하자 나무로 바퀴를 만들었고, 나무 바퀴가 돌에 부딪혀 잘 깨지자 바퀴 가에 철판을 대었습니다. 좀 빨리 달릴 수 없을까? 좀 많이 실을 수 없을까? 연구한 끝에 자동차가 발명이 되었고, 나무 바퀴로 달리다 보니 너무 불편함을 느낀 던 롭이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은 타이어를 발명하였습니다. 핸들이 너무 무거워 유압을 이용한 파워 핸들이, 사고가 나면 산산 조각으로 변하는 유리가 나왔습니다. 안전밸트, 에어백 등 모두는 사용 중 불편함을 느껴 좀 더 편리 할 수 없을까? 좀 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까? 하는 데서부터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나의 삶에 만족하기 보다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더 인간의 약함을 생각해 본다면,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목사의 눈에, 부모의 눈에 문제가 보여 성도들에게, 자녀들에게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해도 그 때는 잔소리로 듣습니다. 괜히 남의 생활에 간섭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고 나면 그 때가서 “아! 이런 일이 있을까봐 그렇게 말씀 하셨구나!”라고 깨닫습니다. 문제와 고난을 당한 후에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연약함입니다. 자식들은 돈 떨어져야 부모에게 연락합니다. 오죽 했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을까요? 사람은 문제가 생겨야 하나님을 찾는, 조금은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정 반대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항상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창34:1-2에 보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고 욕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제 가나안 땅에 입국하여 여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려는 참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이 양을 치고 돌아오자 이 사실을 이야기를 했고,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를 폭행한 세겜에게 세겜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하면 디나를 그의 아내로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할례는 히브리 백성으로 선민 됨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9-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외적인 증거가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인치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하나님의 계약을 남용하고 또 오용하고 있습니다. 창34:15-16에 보니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베푸는 것인데 돈으로 산 바도 없는 이방의 세겜 족속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이는 디나와 결혼을 전제로 한 족장 간에 통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권한 남용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이방인과 결혼을 위해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할례는 양피를 베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위한 세례를 받기까지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세례가 할례를 대신했으므로 세례를 통해서 할례가 종식된 것입니다. 이 세례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피 흘리는 속죄적인 행위로 계약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그 자녀들은 할례를 통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했고,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살인 행위를 행했던 것입니다.(창34:25-27)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형 사고가 발생하자 주변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들이 보복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모든 야곱의 가족들이 전멸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35: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20년 동안 야곱을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이 좋아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세겜에 살다 이런 변을 당한 것입니다.
왜 야곱은 하나님과 약속을 잊고 세겜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다 이루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고, 또 빌2:13에서는“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햇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 성도들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장 큰 장애물인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던 칼을 버리고 그 대신 뜨거운 포옹으로 화해를 청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아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구나!’ 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신앙 여정은 밧단아람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 벧엘을 지나 천국까지 이르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려면 넘어야 할 산과 강 문제 등 크고 작은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미스바(갈르엣 혹은 여갈사하두다)는 그 일차 관문입니다. 그는 그 어려운 힘든 과정을 하나님의 군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 다음 코스는 바로 얍복나루였습니다. 그의 생애에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정말 힘든 관문입니다. 그는 그곳을 통과하면서 환도 뼈까지 위골되는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브니엘의 영광을 체험하며 얍복 강을 통과하였습니다. 이제 야곱의 세번째 관문은 세겜입니다. 이곳은 너무도 쉬운 곳입니다. 작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문제에서 승리하고 작은 문제에서 넘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에서는 승리하였지만, 그 보다 훨씬 작은 아이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마음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쯤이야 라고 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 되었고,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을 놓게 됩니다.
둘째. 약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창34:13-17에 보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야곱이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은혜를 체험했을 때 에서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서 미움과 복수심을 다 제거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화해를 통해서 그가 20년 동안 고민하고 불안해했던 묵은 체증이 씻어졌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화해를 함으로 영적 긴장이 풀리게 되었고 좀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지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가족들도, 종들도, 모든 가축들도 장거리 여행에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숙곳에 살다보니 그 근처에 잇는 세겜 성이 더 살기 좋아 보였습니다. 세겜은 땅이 비옥하고 문화도 발달된 곳이어서 야곱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세겜 성 근처로 이사하기 위해 집 지을 터와 동물들을 가둘 수 있는 농장 터를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샀습니다. 그는 세겜도 가나안 땅이므로 이제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합리화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곳에 정착하고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곳 생활에 푹 젖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푹 빠지다 보니 그는 20년 전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은채 약 10년 그곳에서 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세상에 취해 있는 중에 디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야곱이 도망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셔서 저를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3가지 서원을 했습니다.(창28:20-22) ① 하나님을 평생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② 이 벧엘에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③ “지금은 빈손이지만 앞으로 저에게 물질이 생기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제가 반드시 그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십일조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벌었다고 생각하면 아까워서 십일조 못 드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 십일조 드릴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 서원을 가장 힘들 때 답답하고 고독할 때 두렵고 떨릴 때 하나님 앞에서 했습니다. 그랬었는데 그 후에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생각이 날 때에는 약속 이행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뤘습니다(창33:18-20). 그것은 사람이 서원을 지키지 않게 되면 그것이 곧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23:21에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 말라 더디면 네게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해 주셨습니다. 그로 평안히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창33:18)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 불상사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디나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젊은 세겜 추장의 절제할 줄 모르는 욕정에 그 근본 원인이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벧엘 서원 불이행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더 큰 재앙을 피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그 약점과 허물을 덮기 위하여 또 다른 속임수를 쓰면 더 깊은 수령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야곱은 계약의 불이행으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회개하고 일어서면 더 큰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인데 이 허물을 은폐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보복하려고 하다가 더 큰 낭패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을 불이행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약을 남용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 사건을 잘 압니다. 탕자 생활을 청산하는 유일의 길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내 맘대로, 내 편의대로의 예배 때문입니다.
창33:18-20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세겜 성 근처에 땅을 사고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나름대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곳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전능자)는 뜻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있어야 할 자리,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장소는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어야 합니다. 벧엘에서 약속을 해 놓고 지나고 나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했다 할지라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유리한쪽으로 세겜에 안주하면서 육신적인 편의를 쫓아 생활하면서 약간 마음이 거리낌이 생기니 그곳에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신데,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중요하지 그러니 어디에서든지 정직하게 예배드리면 받으시지 않을까? 이렇게 자기 편리로 예배하고 결정해서 살아가는 야곱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내 중심, 내 편리가 아닙니다.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데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7)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행위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벗어난 그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은 인정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귀하게 여기신 것은 바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했을 때 사흘 길을 걸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 모리아로 가서 거기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예비하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 말씀 즉 약속에 근거한 예배, 교회 중심의 예배를 우리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과 약속하고 성도들끼리 무언의 약속을 통해 모이는 이곳, 주일 낮 이 시간에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시고, 이 시간에 만나 주십니다. 주님은 이곳 이 시간에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의 예배를 청산해야 합니다.
내 만족의 예배, 액땜 예배, 내 편리한 대로의 예배는 우리 곁에서 과감히 몰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지도 않고 세겜에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세겜이란 세상이며 세속화된 종교를 상징합니다. 세겜은 음란과 무질서의 도시였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던 곳이 세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합리화하는 곳이었습니다. 세겜은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 즉 성도들이 살 곳이 못됩니다. 눅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세상 즉 세겜과 같은 곳에서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완전 거지가 될 때까지 놀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을 떠난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라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 어떤 실수도 다 용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2.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과 약속 장소인 벧엘로 올라가서 20년 전 약속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꼭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이 뒤를 좇아와서 죽일 것 같았습니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식구들과 가축들이 벧엘로 올라 갈 때 하나님께서 주변 고을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셔서 감히 야곱의 일행을 가로 막고 시비를 걸거나 공격을 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방해 하는 일이 없이 야곱 일행은 순적하고 평안하게 벧엘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5)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요14:6)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의지하여 언제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4:16) 3. 위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 제일교회는 만복의 근원 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교회 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벧엘로 올라가...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30 여 년 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 30년 동안 야곱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만나기 위해 야곱은 순종을 결심했습니다. 30년 전에에는 혼자였으나, 지금은 온 식구와 더불어 올라갔습니다.
야곱은 식구들을 벧엘로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3 가지 면에서 예배를 준비했습니다.첫째.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라헬도 친정에서 훔쳐온 드라빔을 버렸고, 야곱의 종들(30:43)도 자신들의 우상을 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말씀보다, 은혜보다 더 좋아하는 세상의 것이 우상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야곱은 식구들에게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더럽혀진 마음과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그것은 곧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 자신을 향한 자성(自醒)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았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의 신앙생활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여호수아의 고백 같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생활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죄악의 걸음, 부정했던 걸음, 세속적인 걸음, 자기만을 위한 걸음을 돌려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의복을 바꾸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첫 번째 아담의 옷을 입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새 옷 즉 흰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의 가족은 벧엘에 도착하였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하며 두려워 떨며 들에서 돌을 베고 잘 때, 하나님께서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셔서 축복하신 벧엘에 30여년 만에 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축복하신대로 큰 복을 받아가지고 그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엘 벧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살아야 내 영이 살고, 삶이 삽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 4가지의 복을 주셨습니다. ①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10절) ② 너는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라(11절) ③ 네 후손 중에 왕들이 나오리라(11절) ④ 이 땅을 너와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13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마음과 몸을 드리는 기쁨의 예배를 드리시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3) - 브니엘의 하나님

브니엘의 하나님본문/창32:22-30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는 입신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중국 육조(六朝)시대 양(梁)나라의 유지린 이란 사람이 남군 태수로 승진했을 때 무제(武帝)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그대의 모친은 연세가 많고 덕망도 높으니 ‘그대에게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令卿衣錦還鄕 영경의금환향)’ 마음껏 효도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와 대조적인 말로 錦衣夜行(금의야행)말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라는 뜻이므로, 아무 보람도 없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들이닥친 항우(項羽)는 한 걸음 앞서 입성해 있던 유방(劉邦)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유방은 아방궁을 비롯하여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보존한 채 항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유방이 살려준 진왕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미녀들을 끼고 연일 술잔치를 벌이는 한편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고 금은보화를 약탈했습니다.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항우에게 ”함양일대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이고 토지도 비옥합니다.여기에 도읍을 정하신다면 천하를 호령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하중 한 사람이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폐허로 만든 함양이 눈에 들지 않았고, 또 한시 바삐 고향에 가서 자신의 출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항우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항우는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 걸치고 밤길 걷기錦衣夜行)지’”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금의환향하고 싶습니다. 금의환향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가 출세를 해야 하고 또 이를 반겨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야곱이 20년 만에 돈을 많이 벌어 금의환향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가 20년 전에 뿌려놓은 씨 때문입니다. 법보다 주먹! 말씀보다 내 생각!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가 받을 축복을 가로챈 후에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복을 받아 고향인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평생을 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쌍둥이 형 '에서'의 노여움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32:3-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무섭고 떨렸습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위해 야곱은 다시 또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형에게 줄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위하여 준비한 예물은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14-15절)이었습니다. 이를 그냥 한 번에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앞서 보낸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자기가 대면하려는 꾀를 부렸습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또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뭔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야곱은 시도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예물을 들고 갈 때에도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16-20절)라고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신의 재산 전부를 반으로 나누어 만약 형 에서가 자기를 치면 나머지 반만이라도 건질 계획을 세웠습니다.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는 것입니다. 법 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20년 동안 예수님을 믿은 야곱이었지만, 위기를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보다는 인간의 생각이 앞섰습니다. 홀로 있을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방법을 총동원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다 말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워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냥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았습니다.(24절) 야곱이 기도하기 위해 홀로 남았을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불안에 떨며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야곱을 찾아 왔습니다. 본능적으로 야곱은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착각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부림 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을 찾아와 야곱과 씨름한 사람은 하나님 사자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자는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 즉 신약에 오실 예수님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으로 외롭게 홀로 강가에 머물러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매를 맞아야 깨닫는 인간이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그는 태중에서 그 형의 발꿈치를 잡은 자요 자기 힘으로 하나님과 겨룬 자라. 그는 천사와 겨루어 이겼으며 울면서 그에게 은혜를 구하였다”(호12:3,4). 야곱은 태중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택하신 자이며 이 사실을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알리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상속자로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타락한 인간의 지혜와 술수로 상속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형의 시장기를 이용하여 팥죽으로 장자권을 빼앗으려 하였으며 아비 이삭을 속이고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20년 밧단아람에서 삼촌에게 열 번이나 속고 수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은 자기 힘으로 축복을 쟁취하려 하여 하나님과 다투고 싸우는 야곱의 생애를 대표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자기의 힘, 자기의 부패한 성품을 고집하다 천사로부터 환도뼈(엉덩이 뼈)를 얻어맞고 무력한 자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나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야곱은 울면서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 힘으로 이루려던 교만과 자기 신뢰를 버리고 회개의 눈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가 된 것이다(호12:4). 이러한 사실이 “나를 축복하시기 전에는 내가 주를 놓지 아니하리이다”라는 간절한 호소로 표현 되었습니다.(창32:27).울면서 은혜를 구하라야곱은 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했습니다. 이 씨름 중에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렸습니까? 더 이상 약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야곱은 형이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를 데리고 도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환도뼈가 부러졌으니 도망 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아픔을 견디며 새벽이 되도록 끈질기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의 패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루려 하던 자기 신뢰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힘과 계획이 무능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울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뭔가 믿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야곱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복을 구하라야곱과 씨름하던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야곱에게 나로 가게 하라고 말했는데 이 때 야곱의 대답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 라고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무언지 축복해달라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복은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건강도 아니었습니다. 가정이나 자녀들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모을 만큼 모았지만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자기가 그렇게 소원하던 여자를 그토록 어렵게 아내로 얻었지만 진짜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 인줄 알았는데 복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이 이렇게 매달리고 축복해달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진짜 복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진작 깨달아야했습니다. 진짜 복을 받아야지 복처럼 보이는 가짜 복을 받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야곱이 이렇게 진짜 복을 받아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구하자 그 대답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라고 물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 중에 “주여 내게 영생의 물을 주어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라고 여인이 말하자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고 하셨던 부분과 매우 흡사합니다.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진리와 복이 담겨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여러분, 이제 잘 보십시오. 야곱과 씨름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묻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부르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이 짧은 한 마디,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는 하나님의 질문은 "너는 누구냐"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로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보다 앞서 태어나기 위해 나면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야곱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 혹은 밀어내다’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의 내면에는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 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늘 욕심 부리고 속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밧단 아람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아내도 얻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고 보니 자신이 너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헛살았습니다!". "잘못 살아 왔습니다!". 라고 자신의 현 상태를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죄악과 허물로 인하여 심히 탄식하고 슬퍼했습니다. (이사야-사6장, 모세-출3장, 베드로 -눅5장)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야곱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악 된 삶을 살아온 존재이며,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물어볼 겨를이 없이 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복을 받아야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속임수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야곱처럼, 우리는 스스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투쟁하면서 죄악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된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우리의 본성을 고백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복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연한한 존재이며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온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아니다 이제는 내가 너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리라" (28절)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닫고 얻은 새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더불어 싸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첫째.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거짓되고 죄악 된 삶을 살아왔음을 발견한 후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속이는 자, 거짓된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습관을 따라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거짓된 성품으로써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언 받은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또 다른 뜻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의 삶을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유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심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옛 사람 야곱은 죽었습니다. 새 사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인생이 그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혼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피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속이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싸워주시고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야곱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자기 생명이 보전되었다"(30절)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대면하여 만나주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본성을 깨뜨리셨습니다. 그의 무기력함이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거대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잡힌 자신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본래적인 힘, 환도뼈가 꺾인 것을 느끼자 오히려 담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힘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펼쳐질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아서 그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환도뼈를 다쳐서 다리를 절면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에서'도 무섭지 않습니다. 할렐루야!사랑하시는 여러분본래 우리는 멸망을 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불행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멸망 받을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거짓되고, 허물 많고 죄악 된 우리의 옛 사람은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사람들입니다(롬6:6,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요5:24, 롬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고후5:17).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싸워 주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혼자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혼자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 외롭고 힘들게 싸우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시고 여러분 삶의 많은 역경과 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거듭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인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사람과 씨름할 것이 아니라, 세상과 씨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재산도, 건강도, 자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위기도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천국에 이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평강과 도와주심과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2)-마하나임의 하나님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 (2. 마하나임〈하나님의 군대〉의 하나님)본문/창48:15-16. 창32:1-2 정신과 치료 중에 로고 테라피란(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환난과 역경을 극복케 하는 치료법) 치료법이 있습니다. 이 치료법을 개발한 사람은 빅터 플랭클 박사님입니다. 이 사람은 유태인 의사로서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장기간 동안 죄수 아닌 죄수 생활을 했고, 거기서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내 모든 가족들은 가스실로 보내어져 처형을 당했거나 다른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유일하게 그의 누이만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몰살당해야 했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모든 가치를 파멸 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흉포한 핍박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모두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정신과 의사답게 그가 발견한 특이한 현상은 담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수용소 내에서는 절대 담배를 피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열심히 일해 포상으로 받은 담배 표를 수우프로 바꾸어 굶주림을 면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담배를 피우도록 허락된 사람들은 카포라 불리우는 유대인이면서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창고나 작업장의 감독으로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이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유대인이면서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종종 유대인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용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최후의 며칠만이라도 ‘즐기고자’하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래서 일반 죄수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죽여 달라는 자포자기의 싸인 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디어 낼 수 있다.”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과 같이 여러 가지 문제와 고난 가운데에도 이겨 낼 수 있다는 희망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는 두려움, 불안, 초조, 염려들은 만인의 적입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75가지나 되는 공포증이 있다고 합니다. 예컨데,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고소 공포증, 낮은 곳을 두려워하는 저소 공포증, 전쟁이 일어날까봐 염려하는 전쟁공포증, 그런가 하면 새로운 것은 무조건 싫어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실패 공포증,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결혼도 못하고, 망할까 두려워 새 사업도 시작을 못하는 심리상태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대인 공포증, 폐쇄 공포증, 목욕 공포증, 암흑 공포증, 광장 공포증, 남성 공포증, 미인 공포증, 거울 공포증, 13일의 금요일 공포증, 학교 공포증, 시부모 혹 장인 장모 공포증 수 없이 많은 두려움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걱정이나 두려움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신앙생활에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했습니다. 특별히 루마니아의 리챠드 램브란드 목사님은 1948년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체포되어 14년 동안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마지막 3년 동안은 빛도 차단된 지하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성경을 수 백번 읽었는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시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천사들은 구원받은 후사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을 합니다.(히1:14)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지켜주시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본문 속으로우리는 지난 주 야곱이 고향을 떠나 외삼촌에게로 도망가는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과 하나님께서 야곱이 고향집으로 돌아 올 때 까지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삼촌 집에 종처럼 살살았습니다. 14년은 아내를 구하는데, 그리고 6년은 재산을 모으는데 소요되었습니다. 이 20년 동안에 삼촌은 야곱과 한 약속을 열 번이나 바꾸었으며, 어떻게 하든지 많이 부려먹고 적게 주려는 깍쟁이였고, 노랭이 같은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곳에서 11명의 아들과 1명의 딸 그리고 많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삼촌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신들의 재산을 훔쳐서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이들의 멸시 그리고 시기 질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삼촌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모든 가족과 재산을 모아 삼촌 집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3일 만에 외삼촌 라반은 야곱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자기의 재산은 물론 드라빔까지 훔쳐서 도망한 것을 알고 모든 친척들을 모아 야곱을 잡으려고 쫓아갔습니다. 7일 만에 야곱이 잠시 머무르고 있는 곳에 도착하여 그 다음 날 날이 새면 야곱을 죽이 없애야겠다고 준비하고 있던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다음날 라반은 야곱을 죽이는 대신에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라반은 “내가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 너에게 손대지 말라.”고 하셔서 봐 준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도 야곱은 무덤덤했습니다. 그래서 라반과 작별한 후 고향 땅을 향하여 길을 재촉하고 있는데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습니다. 이에 야곱이 깨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20년 전 벧엘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셔서 나를 지켜주셨는데, 이 사실을 난 몰랐구나! 난 그동안 내가 잘나서 잘 된 줄, 이렇게 부자가 된 줄, 건강한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자리를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지킨 것입니다. 아니 이 하나님의 군대는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야곱(하나님의 택한 자녀)을 지키는 하나님의 군대.창 32:1-2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은 두 진영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이 이곳을 이렇게 부른 이유는 두 군대로 형성된 많은 천사들, 즉 만군(萬軍)의 천사가 야곱 일행의 전후 혹은 좌우에서 옹위했기 때문입니다. 두 진영을 형성한 이 천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진을 쳐 구원 얻을 후사들을 수호하는 일입니다.(시 34:7, 91:11, 히 1:14). 그리스도께서도 이 천군의 존재를 밝히 인정하셨습니다(마 26:53). 이제 고향 땅인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야곱 일행에게 이 같은 군대가 출현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벧엘 언약에 근거한(28:13) 가나안의 참된 계승자인 야곱,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항상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던 것과28:15;31:13), 라반의 온갖 모략에서 보호하신 사실을(31:42)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면 이 사실을 모르면 교만하게 되고 결국 교만하게 되면 얻은 복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모든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하여 주께 감사하며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지금까지의 삶도 지켜 주셨듯이 앞으로의 삶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함입니다. 형, 에서의 보복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야곱에게 이 군대가 친히 친위대가 되어 지켜 줄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이는 성도가 천국 갈 때까지 보호해 주시고 장차 성도의 천국 입성 때 천군 천사가 환영할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마 24:31; 눅 16:2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 아니 영원토록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군대를 동원하셔서 구체적으로 필요 적절하게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⑴ 일상의 삶을 도우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① 야곱의 일 거수 일 투족을 자세히 살펴주셨습니다. 창31장 6절에서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간 야곱과 라반의 행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힘을 다하여 라반을 섬긴 것도... 라반이 야곱을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한 것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라반을 금하사 야곱을 해치 못하도록 지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사 점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 되었고 또 얼룩 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가 얼룩 무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야곱이 14년을 두 아내를 얻기 위해 품꾼 노릇을 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약삭빠른 라반이 야곱에게 제안을 합니다. 여기에서 계속 일하면 품삯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앞으로 어미 양이 낳은 어린 양들 중에 점 있는 것, 얼룩무늬가 있는 것 아롱진 것은 모두 야곱의 것으로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약을 맺을 당시 라반은 일년에 한두 마리 정도 얼룩무늬 양과 점 있는 양이 태어 날 것으로 예상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수의 어린 양이 점을 가지고 얼룩무늬와 줄무늬를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듬해에는 점 있는 것으로만 야곱의 것이 되는 것으로 재계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얼룩무늬 양을 태어나지 않고 점 있는 것만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얼룩무늬 양을 야곱의 것으로 또 계약을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모두 얼룩무늬 양만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열 번이나 말을 바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같이 라반의 짐승을 야곱이 수고한 만큼 삯으로 주셔서 야곱이 헛수고하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야곱의 행한 일과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야곱을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야곱이 최선을 다해 삯을 받을 만큼 부지런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창31장38-39잘에 보면, 야곱은 “낮의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절대 손해 보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② 순간순간 바른 결정을 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 혹 평생을 좌우 한다는 말처럼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바른 결정, 바른 선택을 도와주십니까? 첫째로. 환경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창31:1절에 보니,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고 했고, 2절에서는 야곱을 보는 라반의 안색도 변하여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아마 야곱이 거부가 되니깐 시기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야곱이 속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창30:35에서 아롱진 것 얼룩진 것 검은 양들을 데리고 사흘 길 떨어져 간 것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라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야곱으로 열매 맺지 못하게 하려고 흰 양들만 남겨놓은 것은 라반 자신이었습니다. 이들의 시기심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상황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을 통해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 갈 때가 되었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둘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창31:3에“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알리실 때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배울 때,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주의 사자와 상담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결코 망하거나 손해 보는 일은 없습니다. ③ 바른 결정을 과감히 추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창31:4에 보니 야곱은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라반의 일과 안색이 전과 같지 아니함을 말했습니다.(창31:5-13) 특별히 창31:13에 보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 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고 두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내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준행하라”(16절)고 야곱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담대히 결정하고 20년의 밧단아람의 삶을 청산하고 아버지가 계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귀향의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⑵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 - 라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셨습니다. 창31:22에 보니, 라반이 야곱의 도망한 것을 듣고 7일을 쫓아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습니다. 라반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만나면 죽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창31:29)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운데도 역사하셨습니다.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말라" (창31:24) 그를 전혀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라반은 비록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야곱을 건드렸다가는 자기의 생명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가 지금 라반으로 하여금 너를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종종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위태한 지경에서부터 보호받고 구원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는 것은 내가 잘해서라고 착각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순간순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도와 이 땅에서의 삶을 평안하게 해 주십니다. 사람들의 핍박이나 환난에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도 환난 날에 구원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뿐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하는 자를 책망하십니다. 행12:23에 보면 헤롯왕을 하나님이 치시자 충이 먹어 죽었다“고 했습니다. 왜 헤롯을 하나님이 치셨습니까? 헤롯은 사람들로 인기를 끌기 위해 주의 사자인 야고보를 잡아 칼로 죽였습니다. 야고보를 죽이자 사람들이 너무 좋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⑶ 앞으로 길, 천국 까지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군대, 천군 천사를 통해.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20년 전 형을 속이고 고향집을 떠났는데, 그 형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반드시 고향 땅으로 안전히 돌아오게 해 주겟다고 벧엘에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실을 잘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호해 주셨지만, 이제는 직접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 영어로는 the camp of God 이라 했습니다. the camp는 야전 주둔군을 말합니다. 우리가 미 용산기지 정문에 가면 the camp (David)하며 '데이비드 사령관의 야전군'하며 적혀 있습니다. 그 수는 경우에 따라서는 일개 사단병력이 되기도 하고 연대병력이 되기도 합니다. 이 병력은 작전지역에 항상 주둔하면서 24시간 임무를 수행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상시 병력을 출동하셔서 특별 경호를 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루터의 종교개혁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알브레히트 뒤러였습니다. 뒤러의 그림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아름다운 친구의 우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화가를 꿈꾸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한 사람은 뒤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프란츠 나이스타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생계를 위해 일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 주고 그 사람이 공부가 끝나 돈을 벌게 되면 다른 사람을 도와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뒤러가 그림 공부를 먼저 하게 되었습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이스타인은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서 친구를 밀어 주었습니다. 뒤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서 미술학교를 마치게 되었고, 그림도 서너 편씩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뒤러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그가 일하고 있는 식당에 찾아갔습니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3-4경이었습니다. 친구를 놀래 줄 심사로 그가 일하는 식당 주방으로 몰래 들어섰을 때, 한 사람이 창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의 손은 이미 험한 일로 거칠고 망가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내 친구 뒤러만이라도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뒤러의 친구였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본 순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캠버스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홀린 듯 그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이 바로 지금도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을 뒤에서 도우신 하나님, 뒤러 뒤에 그를 도와주신 하나님과 그의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여기까지 무사히 이른 것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하심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천군 천사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를 보호해 주셨고, 지켜 주셨습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고향인 가나안에 무사히 돌아가도록 도우신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에 무사히 이르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며 담대하게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1)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1.벧엘의 하나님)본문 / 창48:15-16. 창28:10-22. 이 세상에는 약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남자와 여자이고 또 신자와 불신자로 분류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아예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가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타신론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주먹을 믿는 주먹교 신자가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NONE CHRISTIAN(난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이 말, 곧 난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저는 ‘나는 앞으로 크리스챤이 될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신자로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에브리데이 크리스챤이 있는가 하면 오직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쳔이 있습니다. 한번 교회에 등록하면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은혜를 받아 인정받고 칭찬 듣는 신실한 신자가 있고, 반면에 교회에 등록은 하였으나 일년에 한 두 번씩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기독교라고 말하는 이름뿐인 신자도 있습니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변치 않는 믿음으로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독실한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도 가고 점도 치고 아무거나 많이 믿거나 그 중에 하나라도 잘 믿으면 좋지 않으냐? 종교는 다 좋은 것인데, 기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 아니냐? 고 생각하는 내 맘대로 신자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은혜와 능력을 받아 가정도 생활도 모두 변화 받아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하는 참 신자도 있지만, 분명히 주일날 교회도 가고 예배도 드리는데 믿음이 자라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무늬만 신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예배 중심 생활로 복을 받아 전도하고 선교하며 이웃을 섬기는 생활로 칭찬 듣는 경건(거룩)한 신자가 있는가 하면,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피서, 가을에는 단풍구경 겨울에는 스키장 등에 가서 노느라 봉사와 섬김은커녕 도무지 예배드릴 틈이 없는 날라리 신자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언제나 아멘 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아멘 신자, 그러나 항상 이유와 핑계를 대며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핑계 신자도 있습니다. 항상 배우지만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며 배우기를 힘쓰는 제자 신자가 있는 반면, 자신은 더 배울 것이 없다며 배우기를 거절하고 항상 가르치려 드는 선생 신자도 있습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하며 온 몸으로 섬기는 일꾼 신자가 있는가 하면, 주워들은 풍월로 귀만 크고 말만 많은 구경꾼 신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며 주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행하는 주인 신자가 있는 반면 교회에 등록한 지가 몇 년이 되어도 여전히 물 톡톡 튀기며 손님 노릇을 하는 손님 신자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고 문제가 있을 땐 겸손히 기도하는 감사 신자가 있는 반면, 언제나 토를 달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투덜이 신자도 있습니다. 부모나 아내 혹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는 나왔으나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한 채 예배당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마당 신자가 있는가 하면 기왕에 예배드리러 나왔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은혜도 받고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으로 은혜의 보좌(지성소)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안방신자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달콤한 말만 듣기 좋아하고 경고나 심판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훈련받기를 싫어하는 유아(어린이) 신자가 있는 반면, 강한 훈련도 참고 인내하며 따가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들어도 기쁘게 양약으로 받아들이는 장년(아버지) 신자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낮에는 선량한 양민인 체 하다가 밤이 되면 공산당으로 변했던 베트콩들처럼, 교회에서는 신자 같은데 세상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 어둠 속에서 파묻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전도를 방해하는 베트콩(게릴라) 신자, 카멜레온 신자, 어떤 환란과 역경이 와도 참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여 별처럼 빛나는 스타 신자가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신앙도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는 모태신앙이 있는가 하면,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나 율법과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아는 것은 많고,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이 없어서 매사에 못한다고 말하는 ‘못해 신앙’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난 못해, 힘들어서 못해, 바빠서 못해, 전도도 못해, 헌신도 못해, 봉사도 못해..., 입만 열면 못해, 못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변화되면 ‘해요 신앙’의 소유자가 됩니다. 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동안 듣고 본 것은 많아서 남을 판단하고 비판을 하기를 잘하는 ‘못된 신앙’ 혹은 ‘못난 신앙’이 있는 반면, 항상 본을 보이며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모델신앙’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모든 것을 통달했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득도 신앙, 빠삭 신앙이 있는 반면, 신령과 진정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경외 신앙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소유자들이십니까? 그러나 좋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가르치셔서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복 받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의 본문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창 28:10-22은 야곱이 형을 속이고 또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며 형의 축복을 가로챈 뒤, 노여워 살기등등한 형 앞에 감히 설 수가 없어, 어머니의 권유로 멀리 하란 땅 외갓집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가도 무인지경, 풀밭을 헤치고 사막을 지나고, 돌부리에 채이면서 길을 가다가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황혼이 대지를 덮는 시간, 어느 무인지경의 허허 벌판에 이르렀을 때에 몸에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어두워 더 갈 수가 없습니다. 벌판 아무 데나 내던져진 돌을 주워 베개를 삼아 벌판에 눕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은 오지 않았고 수많은 생각들이 야곱의 마음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괜히 형을 속였지, 내가 괜히 아버지를 속였어, 나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어' 등등의 후회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상념에 몸을 뒤척이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연결된 사닥다리가 야곱이 누운 땅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창28:11-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 즉 택한 받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창48장 15-16절에서 파란 만장했던 자신의 한 평생 147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기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자기가 이스라엘이 된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힘으로,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조부 아브라함에서 아버지 이삭 그리고 자기에게로 이어진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날 때부터 지금까지 기르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기르십니다. 항상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기르십니다. 야곱의 환란 날에, 역경 속에서 기르셨던 현장에 함께 찾아가 봄으로서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기르고 계신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야곱을 기르셨습니까? 야곱을 기르신 하나님은 첫째. 벧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 마하나임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브니엘의 하나님이셨고, 넷째. 엘 벧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먼저 벧엘의 하나님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사람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가장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곱은 소위 모태신앙이었음에도 사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한마디로 모태신앙으로서 못해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선데이크리스쳔, 이름뿐인 신자, 무늬만 신자,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유아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예배도 드렸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나, 그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야곱이 어려울 때 도움이나 주시는 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잘 될 때, 문제가 없을 땐 하나님을 찾을 이유도 예배드릴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점집 찾아가고, 절에 가서 빌어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인 종교 생활 꼭 그와 같은 생활이 야곱의 생황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획득 할 때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보다는 아버지에게 들킬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이 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을 속이고 세상의 좋다하는 것(장자의 명분)을 가로채는데 성공을 하였지만 그것이 그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형의 장자명분을 빼앗아 자기의 것을 삼을 때는 순간적으로 좋았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긴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정처 없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지치고 곤하여 쓰러져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 낯선 땅을 유랑 할 때 누구도 그와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현재의 위험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도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야곱의 인생은 피곤하고, 따분하고, 힘들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고 누구로부터도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이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을 에브리데이 크리스쳔, 거룩하고 경건하여 아버지 신자로서 열국의 아비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델신앙, 하나님을 뜨겁게 경외하는 신앙의 소유자로 만들기 원하셔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는 열국의 아비 곧 야곱(형의 발꿈치를 잡은 사기꾼)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 되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 가르치시고, 격려하시고 때론 책망하시어 그 자리에 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계획을 알려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좋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야곱은 좋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모태 신앙일 뿐 전혀 훈련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믿음의 기초부터 바로 세워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바른 믿음을 갖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기초는, 첫째.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나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면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를 가리켜 계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계시는 커텐을 열어 보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셔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 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말씀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대로, 기분 따라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 중심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셋째. 약속 즉 계약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자신을 열어 보이시며 야곱에게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며 인생의 주 되심을 알게 하셨고, 말씀으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고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넷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본문16-17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2. 비젼(VISION),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사람이 무엇으로 삽니까? 역경과 환란 중에 있을 때 인내하며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을 때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을 하는 이유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운 밤에 다가오는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 오셔서 희망을 주십니다. 야곱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⑴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는 하나님본문 13절에“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워있는 현장에 오르락내리락하시는 하나님이 과거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 특히 잘 순종하고, 의지하는 자에게만 역사 하시므로 순종하고 의지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지만, 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막연하게 알던 하나님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세상의 갖가지의 방법으로 물들어 있는 자신에게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에게 역사 하신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내 삶의 위로자가 되시고, 간섭자가 되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의 열심히 있고, 능력 있고, 지혜 있는 자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과거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지금 내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히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⑵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창 28:13-14에“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 자손이 많아지는 것들은 사람들이 누리는 복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의 가계(家系)에 있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복은 후손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잘 되고 안 되고, 있고 없고, 가지고 못 가지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으로 이루어 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인간적인 야비한 수법을 사용하여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되게 하고, 있게 하고, 잘 살게 하고, 낫게 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일들을 이루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분은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있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2:6-10).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며, 내 고민을 들어주시는 분이시며, 내 아픔을 낫게 하고 싸매어 주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시며,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구를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할 때에, 힘들 때에, 괴로울 때에, 아플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 남모를 고민이 있을 때에, 복 받기를 원할 때, 잘 되기를 바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때 그분께 구하고 그분의 의지해야 됩니다.⑶ 임마누엘의 하나님 -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본문15절에“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비록 야곱이 죄를 범하여 도망의 길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셔서 어디로 가든지 지키시며, 이끌어 주시고, 또 앞으로의 일들까지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좀 잘못하고, 죄를 범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잘하는 자에게 열심히 하는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분이 많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록 죄 많고 실수한 야곱이지만 그를 떠나지 않고 찾아오셨고, 그리고 지금도 도와주시고, 간섭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고독할 때에, 내가 외로울 때에, 누군가가 나를 다 떠나가고 아무도 없을 때에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내 옆에서 계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⑷ 비젼을 주시는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비젼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4절)는 열국의 아비가 되는 비젼입니다. 이 비젼을 이룰 때 까지 절대 죽지 않고, 망하지 않고, 굶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저와 여러분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 비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을 알고 이를 이루려는 강한 소망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비젼을 붙잡은 사람은 역경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교회에 비젼을 주셨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사랑과 덕이 넘치는 온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과테 한인 사회를 복음화 하고 중남미와 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를 위한 신전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야곱은 이 비젼을 받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헌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는데 자신의 한 평생을 바친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던 야곱, 자기 욕심을 위해 살던 야곱,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잇던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을 받은 자, 비젼을 가진 자는 행복합니다. 3. 바른 예배 자로 기르시는 하나님 본문 16-17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고 야곱은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 현재 처한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계신 하나님의 전(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그가 있는 그곳을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수롭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상황, 장소가 고통이 있고, 괴로움만 있고 외로움만 있는 장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현재 있는 그곳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잇는 브엘세바에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은 천국에 혹은 성전에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인 천국이요,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지금 믿는 자들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속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고, 저 멀리 천국에만 계시지 않고 내 집에도 계십니다. 내 일터에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일하시면서 피곤하시고 고독할 때에 그 일터에서 여러분들을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천국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삶의 현장에 임한 천국과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주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됩니다. 찬송가495장에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본문18-19에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예배를 드렸으나, 형식적이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습관대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벧엘에서의 예배는 이전의 예배와는 전혀 다른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산인 기름을 몽땅 부어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예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야곱이 바른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바른 예배자로서 살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예배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예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야곱처럼 외로우십니까? 앞길이 막막합니까?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 자리에 엎드려 예배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비젼을 소유한 사람으로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이 세상에서는 복의 근원이 될 때 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길러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6)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라(6)롬3:21-24알래스카는 미합중국 50개 주 중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크기는 미국 본토의 약 5분의 1, 한반도의 7배, 남한의 15배 크기입니다. 1867년 3월 23일, 당시의 국무장관인 윌리엄 스워드(William Seward)는 러시아 무역회사의 부채 700만 달러를 인수하고 보상금 20만 달러를 지급한다는 내용으로 교섭에 합의했는데, 이때 알래스카의 땅 값은 당시 1에이커(약1천224평)당 고작 ‘2센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당시 얼음이나 있는 아이스박스로 알려졌던 이 땅을 사들이자 의회는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대통령 죤슨과 국부장관 스워드를 의회로 소환하여 엄청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알래스카가 세계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714년, 러시아의 피터 1세의 명령을 받은 베링(Bering)이 알래스카 일대를 탐험하기 시작했고, 그 후 캐더린 대제가 유업을 계승했습니다. 당시 알래스카 모피가 러시아 궁정 내에서 크게 환영 받은 것을 계기로 러시아는 알래스카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어 러시아의 해군이 파견되어 주둔하면서 러시아가 점유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도 알래스카 개발의 뜻을 세우고 미국 서북부의 오리건 주에 기지를 두었을 뿐 아니라 이미 1778년에 탐험가 쿡 선장이 쿡 만(현재 앵커리지 근방)까지 답사하기도 할 만큼 관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1853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 잘 알려진 크림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터키, 프랑스, 영국 연합군과 싸워 이기기에는 러시아로서는 역부족이었고 전쟁 중 발생한 발진 장티푸스 등 전염병 또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나라 안에서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농민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이렇게 안팎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영국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해 1859년 미국에게 양도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남북 전쟁(1861-1865)으로 알래스카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전쟁 이후 미 서부의 몇 개 주에서 알래스카 매수운동을 벌이자 정부에서도 다시 교섭에 나섰습니다. 결국 1867년 720만불이라는 헐값에 미국은 알래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 거래가 성사된 후 러시아에서는 시원하게 팔아 넘겼다고 기뻐하며 교섭 당사자에게 거액의 상금을 하사하기도 했으나 매수한 미국 측에서는 알래스카를 ‘이 세상의 지옥’이니 ‘스워드의 냉장고’니, 비난하는 여론이 일었고 심지어는 국무장관이 뇌물을 받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시끄러웠습니다. 이렇게 웃음거리가 되었던 거래 이후 30년도 채 못 된 1896년 캐나다와 알래스카 국경 지역의 클론다이크 시냇물에서 사금이 발견되면서 알래스카의 ‘노다지 금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금뿐만이 아니라 알래스카의 한 섬에서 수확된 모피 가격만도 알래스카에 지불한 720만 달러의 7배의 액수로 거래되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의 희비가 엇갈리게 된 것입니다. 정부에서 공동조사단을 파견하여 탐사한 결과 그 땅엔 순금, 백금, 풍부한 어장, 우거지 산림, 게다가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신문은 알라스카는 아이스박스가 아니라 황금박스를 거저 주었다고 대서특필했습니다.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은혜가 그저 주어졌습니다. 그 은혜와 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엡2:8-9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무료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롬3:23-24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선물은 그냥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준비하신 선물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니 양이 차지 않습니다. 초라해 보입니다. 마치 알라스카가 얼음뿐인 땅으로 보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처음엔 별로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라스카에 엄청난 보화가 숨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 속에도 상상 할 수 없는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 예수 속에는 죄 용서의 보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보물, 기도하면 응답받는 보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보물, 각양 좋은 것으로 언제나 공급해 주시는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는 보물입니다. 이 모든 보물이 예수님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하나 얻으려고 힘쓰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제가 믿기로는 여기 계신 거의 모든 분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어떻게 사셨는가를 유심히 살펴보고 예수님을 본받아 100% 예수님처럼 살 수는 없을 지라도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일을 한두 가지 만이라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고 한두 가지만이라도 잘 하려고 하면 그 한두 가지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첫째,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중점적으로 행하셨던 일이 무엇인가? 가 바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애수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가장 중점적으로 행하셨던 일이 무엇입니까? 또 예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까? 정답은 전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전도하려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직접 전도하는 현장에서는 항상 곁에 계셔서 도와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1. 예수님의 전도 우리가 예수님의 전도를 본 받아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또 전도자들에게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⑴ 분명한 목표를 가지셨던 예수님 막1: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무엇을 하셔야 할 지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이적도 다 전도를 위함이었습니다. 전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12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⑵ 영혼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예수님은 동정심을 가지셨습니다. 눈먼 자를, 문둥병자를, 귀신들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음을 아시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고쳐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식사하실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일하셨습니다. 우리에 있는 99마리 양 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다니셨으며, 찾은 즉 기뻐하셨습니다(눅15:5-7) 눅19:41-42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이유는 도시 때문이 아니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믿지 않고 멸망을 받아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시고 안타까워 우신 것입니다. ⑶ 전도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주님의 공생애 3년은 기도로 점철된 3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히5:7에서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눅6:2) 공공연히 아버지께 기적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마14:19, 요11:41) 때로는 홀로 호젓한 장소에서(막14:13), 제자들과 함께(눅9:28) 그리고 새벽에도 기도하셨습니다.(막1:35) 이 모든 기도는 대부분 전도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2, 전도자로서 살기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전도자로 살 때 하나님께는 크게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는 성도들에게 전도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때론 명령하고 있습니다. 고전1: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딤후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막16:15“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자로 살기를 다짐하고 소망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⑴ 분명한 목표를 정하라 여행의 목적지도 정해 놓지 않고 공항에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 할 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를 정해야 합니다. 가족 중 불신자, 이웃, 직장 동료, 친구, 낙심자, 만나기 쉽고 평상시 교제 중에 있는 사람이면 매우 좋습니다. ⑵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라예수님의 전도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전도의 방법은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언행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상대방을 인정해 주는 것도 사랑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불신자를 죄인 취급하거나, 혹 무시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면 관계가 깨질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인정해 주고, 아내는 남편을 인정해 주며, 도움이 필요할 때 겸손히 섬겨 줄 때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장점을 찾아 칭찬해 주고 예절을 갖추어 무례히 행치 아니 할 때 관계는 더욱 깊어집니다.⑶ 쉬지 말고 기도하라 다니엘처럼 하루 세 번 기도합니다. 에레미야처럼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야곱처럼 철야기도 합니다. 다윗처럼 새벽에 기도합니다. 성령께서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령 충만 하여 권능 있는 전도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단의 방해를 물리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전도 대상자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항상 기도합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합니다. 태신자와 대화 중에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전도에 대한 오해의 장벽을 넘으라.이와 같은 복된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장벽이 있습니다. 이 오해의 장애물들을 우리 마음과 생각에서부터 제거하면 우리는 쉽게 전도자의 삶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⑴ 빈 자리를 채우라?성경에 없는 말은 아니지만, 주님의 의도와는 좀 거리가 있는 말입니다. 전도의 모티브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집의 아이가 가출해 버려서 방이 비어 있습니다. 이때 아버지가 가출한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아이를 찾아 나섭니까? 아니면 빈 방을 보니 썰렁해서 찾아 나섭니까? 전도는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이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이를 찾아 나선 부모의 마음이 곧 전도의 모티브가 되어야 합니다. ⑵ 전도는 교회 프로그램 중 하나?한국에 있을 때 보니 가끔 교회가 노방 전도를 나갑니다. 띠를 두르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전도를 합니다. 또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해서 대대적으로 행사를 치룹니다. 그러나 그 행사가 끝나고 나면 전도에서 손을 뗍니다.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렇게 전도가 교회의 프로그램 혹 연례행사가 되면 안 됩니다. 전도는 성도들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⑶ 내가 누군가를 믿게 해야지?전도를 내가 누군가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전도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전도는 내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는 복음을 단순히 타인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전도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에게 전하는 것이고, 또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의 역사로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전해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전도만 강조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게 했다.’라는 식의 교만이 나타나고, 반면 기도만 강조하고 전하지 않으면 무책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병행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전해서 안 믿는다고 해서 너무 부담 가질 것도 없고, 내가 전해서 믿었다고 해서 너무 뽐낼 것도 없습니다. ⑷ 전도는 교회나 목사님만 좋게 하는 것?전도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좋지 않은 것은 전도를 하면 교회나 목사님만 좋게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생각인데, 그것은 교회나 목회자를 하나의 비즈니스로 생각한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교회는 비즈니스 센터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이 비즈니스 센터의 최고 경영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교회 부흥으로 생긴 유익을 교회나 목회자가 독차지하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교회 부흥으로 생긴 유익이나 복을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데 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전도하라고 하신 것은 성도들을 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참된 은혜와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면 전도는 교화와 목사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하는 성도들에게 7가지의 복을 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 주시는 복입니다.(마28:18-20) 행18:9-10에 보니"...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자와 항상 동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둘째. 구원과 천국이 더욱 확실해 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눅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셋째.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누리며 삽니다.(마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넷째. 별처럼 빛나는 복을 누립니다.(단12:2-3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들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섯째.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약5:20에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 받은 사람의 죄를 덮는다는 뜻이냐, 전도한 사람의 죄를 덮는다는 뜻이냐, 해석상의 문제가 있으나 그러나 제 생각에는 전도한 사람의 죄를 덮어 주신다는 뜻으로 믿습니다.여섯째. 성숙한 신앙인,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전도자는 온유해 집니다. 겸손해 집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됩니다. 베푸는 자가 됩니다. 인내합니다. 항상 기도합니다. 말은 언제나 긍정적이며,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희생합니다.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결국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숙한 성도로 변화됩니다. 일곱째. 자기 발전과 칭찬 그리고 각양의 복을 누립니다.(행2:47)전도자가 되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말씨가 달라집니다. 마음씨가 달라집니다. 맵씨가 달라집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우선순위를 압니다. 돈을 바르게 쓸 줄 압니다. 행동은 민첩하고, 얼굴엔 미소가, 그리고 칭찬하기 좋아합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술이 생기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부지런해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믿음 때문에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어려움이 와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칭찬받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하여 영혼이 강건해지고, 육체가 강건해 지며 범사가 잘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자손이 잘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중국에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송전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많이 하고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젊은 나이에 그만 3남매를 남겨놓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예수를 잘 믿고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왜 빨리 죽을까?"하고 의심을 했는데 후에 그 3남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송 전도, 이 사람의 본래 이름은 한 교준 이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열세 살 때 양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송 가수(찰리 송)로 성과 이름을 바꾼 그는 신학대학을 졸업, 선교사가 돼 귀국하게 됩니다. 송 가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의 딸인 예계진과 결혼하여 3딸을 낳은 후 훗날 절강 재벌로 성장해 손 문의 혁명자금을 지원하는 혁명동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큰 딸 송애령은 산서 성 최대의 금융재벌이던 공상희와 결혼했고 둘째딸 송경령은 중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손 문의 아내가 되었고, 그의 아들 송자문은 경제학자로서 중국의 경제장관이 되었고, 막내딸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서 한 때는 그 송전도의 3남매가 중국 전 영토를 다 통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와 같은 각양의 은혜와 복을 준비해 놓으시고 받을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성도를 찾고 있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첩경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예비된 복을 받아 누리는 제일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