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1)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1.벧엘의 하나님)본문 / 창48:15-16. 창28:10-22. 이 세상에는 약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남자와 여자이고 또 신자와 불신자로 분류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 가운데는 아예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가 있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은 타신론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주먹을 믿는 주먹교 신자가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NONE CHRISTIAN(난 크리스챤)이라고 합니다. 이 말, 곧 난 크리스챤이라는 말을 저는 ‘나는 앞으로 크리스챤이 될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는 참으로 많은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주일은 물론 일주일 내내 신자로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에브리데이 크리스챤이 있는가 하면 오직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쳔이 있습니다. 한번 교회에 등록하면 교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은혜를 받아 인정받고 칭찬 듣는 신실한 신자가 있고, 반면에 교회에 등록은 하였으나 일년에 한 두 번씩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기독교라고 말하는 이름뿐인 신자도 있습니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변치 않는 믿음으로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독실한 신자가 있는가 하면, 교회도 가고 점도 치고 아무거나 많이 믿거나 그 중에 하나라도 잘 믿으면 좋지 않으냐? 종교는 다 좋은 것인데, 기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 아니냐? 고 생각하는 내 맘대로 신자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은혜와 능력을 받아 가정도 생활도 모두 변화 받아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하는 참 신자도 있지만, 분명히 주일날 교회도 가고 예배도 드리는데 믿음이 자라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무늬만 신자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예배 중심 생활로 복을 받아 전도하고 선교하며 이웃을 섬기는 생활로 칭찬 듣는 경건(거룩)한 신자가 있는가 하면,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피서, 가을에는 단풍구경 겨울에는 스키장 등에 가서 노느라 봉사와 섬김은커녕 도무지 예배드릴 틈이 없는 날라리 신자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언제나 아멘 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아멘 신자, 그러나 항상 이유와 핑계를 대며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핑계 신자도 있습니다. 항상 배우지만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며 배우기를 힘쓰는 제자 신자가 있는 반면, 자신은 더 배울 것이 없다며 배우기를 거절하고 항상 가르치려 드는 선생 신자도 있습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하며 온 몸으로 섬기는 일꾼 신자가 있는가 하면, 주워들은 풍월로 귀만 크고 말만 많은 구경꾼 신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섬기며 주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행하는 주인 신자가 있는 반면 교회에 등록한 지가 몇 년이 되어도 여전히 물 톡톡 튀기며 손님 노릇을 하는 손님 신자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하며 찬양으로 영광 돌리고 문제가 있을 땐 겸손히 기도하는 감사 신자가 있는 반면, 언제나 토를 달고 투덜거리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투덜이 신자도 있습니다. 부모나 아내 혹 남편의 강권에 못 이겨 교회에는 나왔으나 아무런 은혜를 받지 못한 채 예배당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마당 신자가 있는가 하면 기왕에 예배드리러 나왔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은혜도 받고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으로 은혜의 보좌(지성소)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안방신자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달콤한 말만 듣기 좋아하고 경고나 심판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훈련받기를 싫어하는 유아(어린이) 신자가 있는 반면, 강한 훈련도 참고 인내하며 따가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들어도 기쁘게 양약으로 받아들이는 장년(아버지) 신자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낮에는 선량한 양민인 체 하다가 밤이 되면 공산당으로 변했던 베트콩들처럼, 교회에서는 신자 같은데 세상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는 사명을 저버리고 세상 어둠 속에서 파묻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전도를 방해하는 베트콩(게릴라) 신자, 카멜레온 신자, 어떤 환란과 역경이 와도 참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여 별처럼 빛나는 스타 신자가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신앙도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는 모태신앙이 있는가 하면,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으나 율법과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것이 많아 아는 것은 많고, 말이 많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이 없어서 매사에 못한다고 말하는 ‘못해 신앙’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난 못해, 힘들어서 못해, 바빠서 못해, 전도도 못해, 헌신도 못해, 봉사도 못해..., 입만 열면 못해, 못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변화되면 ‘해요 신앙’의 소유자가 됩니다. 또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는 동안 듣고 본 것은 많아서 남을 판단하고 비판을 하기를 잘하는 ‘못된 신앙’ 혹은 ‘못난 신앙’이 있는 반면, 항상 본을 보이며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모델신앙’도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로 눈을 지그시 감고 모든 것을 통달했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득도 신앙, 빠삭 신앙이 있는 반면, 신령과 진정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경외 신앙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신앙의 소유자들이십니까? 그러나 좋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가르치셔서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복 받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의 본문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창 28:10-22은 야곱이 형을 속이고 또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이며 형의 축복을 가로챈 뒤, 노여워 살기등등한 형 앞에 감히 설 수가 없어, 어머니의 권유로 멀리 하란 땅 외갓집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가도 무인지경, 풀밭을 헤치고 사막을 지나고, 돌부리에 채이면서 길을 가다가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황혼이 대지를 덮는 시간, 어느 무인지경의 허허 벌판에 이르렀을 때에 몸에 피곤이 밀려왔습니다. 어두워 더 갈 수가 없습니다. 벌판 아무 데나 내던져진 돌을 주워 베개를 삼아 벌판에 눕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으나, 쉽게 잠은 오지 않았고 수많은 생각들이 야곱의 마음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괜히 형을 속였지, 내가 괜히 아버지를 속였어, 나의 욕심이 너무 지나쳤어' 등등의 후회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상념에 몸을 뒤척이다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연결된 사닥다리가 야곱이 누운 땅까지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창28:11-15)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 즉 택한 받은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창48장 15-16절에서 파란 만장했던 자신의 한 평생 147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기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자기가 이스라엘이 된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힘으로,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조부 아브라함에서 아버지 이삭 그리고 자기에게로 이어진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날 때부터 지금까지 기르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기르십니다. 항상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기르십니다. 야곱의 환란 날에, 역경 속에서 기르셨던 현장에 함께 찾아가 봄으로서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어떻게 기르고 계신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야곱을 기르셨습니까? 야곱을 기르신 하나님은 첫째. 벧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 마하나임의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브니엘의 하나님이셨고, 넷째. 엘 벧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먼저 벧엘의 하나님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사람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가장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믿음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곱은 소위 모태신앙이었음에도 사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한마디로 모태신앙으로서 못해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선데이크리스쳔, 이름뿐인 신자, 무늬만 신자,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유아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예배도 드렸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큰 깨달음이나, 그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야곱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야곱이 어려울 때 도움이나 주시는 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잘 될 때, 문제가 없을 땐 하나님을 찾을 이유도 예배드릴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려울 때 점집 찾아가고, 절에 가서 빌어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인 종교 생활 꼭 그와 같은 생활이 야곱의 생황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획득 할 때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생각보다는 아버지에게 들킬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이 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을 속이고 세상의 좋다하는 것(장자의 명분)을 가로채는데 성공을 하였지만 그것이 그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자기 형의 장자명분을 빼앗아 자기의 것을 삼을 때는 순간적으로 좋았습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소유하긴 하였지만 이로 인하여 정처 없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가던 중 한 곳에 이르러 지치고 곤하여 쓰러져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고향과 가족들을 떠나 낯선 땅을 유랑 할 때 누구도 그와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현재의 위험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도 그를 더욱 초조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야곱의 인생은 피곤하고, 따분하고, 힘들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고 누구로부터도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이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야곱을 에브리데이 크리스쳔, 거룩하고 경건하여 아버지 신자로서 열국의 아비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델신앙, 하나님을 뜨겁게 경외하는 신앙의 소유자로 만들기 원하셔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는 열국의 아비 곧 야곱(형의 발꿈치를 잡은 사기꾼)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 되도록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 가르치시고, 격려하시고 때론 책망하시어 그 자리에 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계획을 알려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좋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야곱은 좋은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모태 신앙일 뿐 전혀 훈련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믿음의 기초부터 바로 세워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오셔서 바른 믿음을 갖도록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믿음의 기초는, 첫째. 하나님 중심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나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을 이루면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를 가리켜 계시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계시는 커텐을 열어 보인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 오셔서 자신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 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기도 하지만, 언제나 말씀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대로, 기분 따라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경 중심의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셋째. 약속 즉 계약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 자신을 열어 보이시며 야곱에게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며 인생의 주 되심을 알게 하셨고, 말씀으로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고 야곱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넷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본문16-17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전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2. 비젼(VISION),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사람이 무엇으로 삽니까? 역경과 환란 중에 있을 때 인내하며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을 때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자살을 하는 이유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운 밤에 다가오는 절망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 오셔서 희망을 주십니다. 야곱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⑴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에도 계시는 하나님본문 13절에“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워있는 현장에 오르락내리락하시는 하나님이 과거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 특히 잘 순종하고, 의지하는 자에게만 역사 하시므로 순종하고 의지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지만, 잘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막연하게 알던 하나님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세상의 갖가지의 방법으로 물들어 있는 자신에게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에게 역사 하신 엄청난 능력의 하나님께서 오늘 지금, 내 삶의 위로자가 되시고, 간섭자가 되시는 하나님임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의 열심히 있고, 능력 있고, 지혜 있는 자의 하나님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과거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오늘 현재의, 지금 내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히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⑵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창 28:13-14에“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것, 자손이 많아지는 것들은 사람들이 누리는 복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아브라함의 가계(家系)에 있어서 가장 절실히 필요한 복은 후손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들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잘 되고 안 되고, 있고 없고, 가지고 못 가지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림으로 이루어 질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명분을 인간적인 야비한 수법을 사용하여 빼앗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되게 하고, 있게 하고, 잘 살게 하고, 낫게 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일들을 이루시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그분은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있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삼상2:6-10).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며, 내 고민을 들어주시는 분이시며, 내 아픔을 낫게 하고 싸매어 주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시며, 변화되지 않는 그 누구를 변화시켜 새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연약할 때에, 힘들 때에, 괴로울 때에, 아플 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 남모를 고민이 있을 때에, 복 받기를 원할 때, 잘 되기를 바랄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때 그분께 구하고 그분의 의지해야 됩니다.⑶ 임마누엘의 하나님 -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본문15절에“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비록 야곱이 죄를 범하여 도망의 길에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셔서 어디로 가든지 지키시며, 이끌어 주시고, 또 앞으로의 일들까지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좀 잘못하고, 죄를 범하고, 열심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잘하는 자에게 열심히 하는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분이 많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록 죄 많고 실수한 야곱이지만 그를 떠나지 않고 찾아오셨고, 그리고 지금도 도와주시고, 간섭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고독할 때에, 내가 외로울 때에, 누군가가 나를 다 떠나가고 아무도 없을 때에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시고 내 옆에서 계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⑷ 비젼을 주시는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비젼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소망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14절)는 열국의 아비가 되는 비젼입니다. 이 비젼을 이룰 때 까지 절대 죽지 않고, 망하지 않고, 굶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특히 저와 여러분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 비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뜻을 알고 이를 이루려는 강한 소망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비젼을 붙잡은 사람은 역경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교회에 비젼을 주셨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사랑과 덕이 넘치는 온유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과테 한인 사회를 복음화 하고 중남미와 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를 위한 신전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야곱은 이 비젼을 받고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헌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는데 자신의 한 평생을 바친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던 야곱, 자기 욕심을 위해 살던 야곱, 세상 욕망에 사로잡혀 잇던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젼을 받은 자, 비젼을 가진 자는 행복합니다. 3. 바른 예배 자로 기르시는 하나님 본문 16-17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고 야곱은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 현재 처한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하나님의 계신 하나님의 전(殿)”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그가 있는 그곳을 별로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대수롭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상황, 장소가 고통이 있고, 괴로움만 있고 외로움만 있는 장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자신이 현재 있는 그곳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잇는 브엘세바에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은 천국에 혹은 성전에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곳이 하나님의 집인 천국이요,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지금 믿는 자들의 마음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들 속에 임하여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지 않고, 저 멀리 천국에만 계시지 않고 내 집에도 계십니다. 내 일터에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일하시면서 피곤하시고 고독할 때에 그 일터에서 여러분들을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곳이 지옥이 아니라,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천국임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삶의 현장에 임한 천국과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주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됩니다. 찬송가495장에 보면,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본문18-19에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예배를 드렸으나, 형식적이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습관대로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벧엘에서의 예배는 이전의 예배와는 전혀 다른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산인 기름을 몽땅 부어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예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야곱이 바른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바른 예배자로서 살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예배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예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야곱처럼 외로우십니까? 앞길이 막막합니까? 하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 자리에 엎드려 예배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기르시는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비젼을 소유한 사람으로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이 세상에서는 복의 근원이 될 때 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길러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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