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2)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는 법(2)
본문/고전10:1-11


오스 기니스가 쓴 소명이라는 책에 보면 윌리엄 윌버포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1787년 10월 28일 주일, 그가 쓴 일기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은 내 앞에 두 가지 큰 과제를 주셨다. 그것은 노에 매매의 폐지와 관습(Manners)의 개혁이다.”」 이 일기장의 주인공은 영국을 혁명의 위기로부터 구원해 낸 윌리엄 윌버포스입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대부분 노예매매가 골치 아픈 문제이긴 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중단되면 경제적인 파산이 초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 매매는 잘못되고 악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국회의원이 되게 하신 이유가 이 악하고 무시무시한 노예매매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 이 제도가 폐지 될 때 까지 쉬지 않고 끝까지 싸우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과업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위해 무려 46년간이나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반대를 극복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비방은 물론 두 번이나 신체적인 공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노예 매매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용인되었으며, 이 제도는 오늘날 미국의 방위산업만큼이나 대영제국의 경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반대 세력들은 영국 여왕을 비롯하여 해군 제독 넬슨 그리고 식민지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막한 상인들 까지 총 망라하고 있었기에 윌버포스의 투쟁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25세에 예수님을 만난 윌버포스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이 노예매매제도의 폐지에 있음을 알았기에 46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간 결과 결국 이루어 내고 말았습니다.(윌버포스는 위협과 반대에도 기진하지 않고 시와 노래, 사진판매, 노예제도를 통해 생산된 설탕 불매 운동, 그리고 탄원서 제출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한 대중여론 조성과 책자 출판을 통해 노예제도 폐지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하여 발생한 후광을 업고 그는 여러 차례 법안 제출을 시도하여 마침내 1807년 1월 2일에 '노예매매 폐지법'(The Abolition Act) 통과를 이끌어 내 노예매매 금지를 법제화하는 전 세계 역사상의 획기적인 사건을 성취해 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계속 투쟁하여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자그마치 46년 만에 영국 국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노예해방 법령'(The Emancipation Act)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3일 후, 윌버포스는 "나로 하여금 영국이 노예제도를 통해 얻어지는 2천만 스털링의 돈을 포기하는 날을 목도하고 죽게 하시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살아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 의욕이 넘치며, 목숨을 걸고 이루고 싶은 사명이 있을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윌버포스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광야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달려가야 할 지점, 이루고 싶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여러 가지 위협과 외로움을 능히 극복하고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냐 보다 어떤 마음 자세로 사느냐, 어떤 믿음으로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 안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광야에 있어도 천국을 느끼며 살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쉬운 예를 든다면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를 가야합니다. 그런데 군대를 어떤 자세를 가지고 다녀오느냐에 따라 더 멋있는 젊은이로 변하기도하고 오히려 군대가기 전보다 더 추한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군대가기 전에는 철이 없고, 부모의 마음도 몰라주고 그저 돈만 쓰고 인생을 낭비하던 사람이 제대를 후에는 효자가 되고 열심히 자기의 일을 충실히 감당해 내는 훌륭한 성인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군대가기 전에는 순진하고 부모 말도 잘 듣고 착한 아들이었는데, 제대한 후에는 군에서 배운 담배와 술에 찌들고, 다른 부모들과 비교하며 허구 헛날 돈이나 쓰고 다니며 못된 망나니 짖을 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군대가기 전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기왕에 군대 가는 것 뭔가 배우고 잘못된 것은 고치는 기회로 삼겠다고 다짐하며 군대간 사람은 변해서 옵니다, 그러나 오라고 하니 가서 시간 때우고 적당히 살다 오면 되겠지 하는 사람은 군대 생활이 지겹고 힘들며 불평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보람도 없고 또 군 생활 중 상관에게 욕먹기 십상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똑같은 광야를 통과하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광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쉽게, 적당히, 고생을 덜 하며...그러나 이런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기왕에 통과할 광야라면 어떻게 하면 은혜롭게 이 광야를 통과 할 수 있을까? 하는 자세를 지녔어야 했습니다. 이는 곧 광야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서 광야를 통과 한 후에는 영 육간에 건강하며, 은혜가 충만하여 자신감이 넘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은혜로운 마음, 바른 자세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를 고생하며 통과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현대를 살고 잇는 우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기왕에 통과 할 광야라면 은혜롭게 통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롭게 광야를 통과 할 수 있을 까요?
1.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은혜롭게 통과합니다.
2. 순결한 삶을 추구 할 때 은혜롭게 통과합니다.
3. 주님을 시험하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 때 은혜롭게 통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9절에“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민21장에 기록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4-6)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착하지 못한 채 40년 동안 계속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텐트를 쳤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도착해 보니 얼마 전에 지나왔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화가 났습니다. ‘소위 모세가 우리를 지금 뺑뺑이를 돌리는 구나! 한 자리에서 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하더니, 지났던 곳에 다시 온 것을 보니 길을 잊었던지 아니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일 작정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 불 뱀이 나와 원망하는 백성들을 물어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이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해야 하는가? 에 대한 이유입니다. 둘째는 마음상하고 괴로울 때 원망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며, 그러므로 마음이 괴롭고 답답할 때, 원망대신 회개를 해야 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회개합니다. 회개는 문제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서 발견하는 것이고, 원망은 문제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방황해야 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민13장 14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12명의 정탐꾼이야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 한 사람씩 12명으로 구성된 나안 땅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에스골 골짜기에서 딴 포도송이를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온 회중이 모인 앞에서 가나안 땅에 대한 보고를 했습니다. 민13:26-27에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희망에 찬 보고입니다. 즐거운 보고, 새 힘을 솟게 하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희망과 소망이 넘치는 보고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민13:28-33에 보니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우리 속담에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된다.’고 했는데, 이들의 보고는 처음에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에 부풀도록 했으나, 결국 낙심케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의 인생에서 ‘아멘’의 인생으로우리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것은 ‘그러나’ 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전에는 ‘그러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아멘이십니다. 그래서 고후1:18-20에서는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고, 마5:37에서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면 되는데, ‘아멘 해야지요. 그러나 어떻게 아멘만 하고 살 수 있나요?’ 토를 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아멘 하지 않는냐고 물으면 아멘 해 놓고 못 지키면 어떻게 하느냐?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아멘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 힘으로 아멘 하고 지킬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됩니까?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멘’ 하는 것은 ‘아멘’해 놓고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그러나’하면서 가나안 땅을 악평한 것은 불신앙이었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였습니다. 민14:1에“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고 했고, 4절에는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14:11)고 말씀하시며 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그들의 믿음대로 광야에서 죽도록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머물게 하셨던 것입니다.(“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찌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 민14:28-34)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 혀 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말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말은 내 속에 있는 생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와 같이 방황하게 된 것은 그들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된 것입니다. 불신앙의 말, 원망 불평 대신에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안되는 사람을 보면 언제나 그 말이 부정적입니다.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불평 할 일이 생깁니다. 시비 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말 때문에 시비가 걸려 주변이 시끄럽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3:6)고 혀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복을 누린다 이와 반대로 혀를 잘 사용하면 복을 받게 됩니다. 막 9장에 보면 간질병 귀신이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부탁하자 예수님께서는“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이에“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일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온갖 구하는 것에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전능하셔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큰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며 사람들을 격려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사람은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케 되느니라그러므로 성도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18:20-21에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케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말속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대단한 말의 능력을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말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는 자연시험을 통해서 속속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식물은 동물은 동요와 조용한 음악을 (Green Music)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도 닭을 기를 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돼지를 칠 때에도 특히 어미 돼지에게 가서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착하고 예쁘다는 말을 많이 하며 키웠습니다. 이렇게 칭찬 받은 어미돼지는 아기도 잘 낳고 잘 길렀습니다. 이렇게 말이 중요합니다.
첫째, 말에는 미래를 좌우하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말에는 엄청난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말이 씨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고(히11;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노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도 언어를 통해 미래를 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첫 사람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창2:19~20)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한 모든 만물들의 이름은 첫 사람 아담이 말한 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아담에게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말의 권세는 아담의 후손인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때 세계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무하마드 알리의 별명은‘떠버리’였습니다. 그는 무명일 때부터 "나는 세계 최고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알리는 링 위에 올라가자마자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링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혼자 말로 “이번 경기에서는 나비처럼 날라서 벌처럼 쏘겠다." 중얼 거렸습니다. 그는 결국 그의 말대로 세계 최고의 복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말은 사람의 마음과 뇌에 새겨집니다. 이를 가리켜 말의 각인력이라고 합니다. 말에 각인력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말 하는 순간 우리 뇌 속에 그 말이 새겨진다는 뜻입니다. 대뇌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말은 뇌 세포에 98%정도의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말하면 뇌가 말에 대해 반응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학교에 다녀오면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지 않고 무엇을 말하고 왔느냐고 묻는 다고 합니다. 말을 할 때 그 말이 어린이들의 머리 속에 새겨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새겨지고 나면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새겨진 것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 대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말은 매고 푸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9)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매고 푸는 것이 우리의 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는 말과 기도가 하늘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삶을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생활이 긍정적이 됩니다. 우리가 입으로 "아이고 죽겠네" 하고 말하면 어깨부터 축 늘어집니다. 죽겠다고 말하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말로 우리 자신을 격려해야 합니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할 수 있다고 선포해야합니다.
셋째. 말은 우리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심령을 자극하고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돕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행동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혀가 큰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갔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말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습니다. 서울 가겠다 말하고 뉴욕에 가는 거의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말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말은 마음의 생각이 입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12:34-35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고 했고, 고후4:13에 보니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 했습니다. 말은 마음의 생각, 마음에 있는 바가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이 나오고 믿음 있는 척 하지만, 원망과 불평 그리고 세상적인 말을 많이 한다면 사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자주하면 믿음이 자라납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말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말입니다. 긍정적인 말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들고 낙심이 되는 환경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과 손에 만지는 것이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보고 듣고 말을 할 때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재능이나 돈이나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적인 말의 올무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믿음으로 은혜를 선포하며 광야를 통과하라본문의 갈렙과 여호수아을 보십시오. 민13:30에 보니,“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고 했고, 민14:6-9에 보니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안정시켰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의 말을 하며, 믿음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광야를 은혜롭게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통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일 가족여러분 ! 여러분 모두 이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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