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6) - 엘 벧엘 그 후의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 이후
본문/창35:9-15

미 동부 코네티컷 주 뉴헤이번에 자리 잡은 예일 대학은 1974년 이후 네 명의 대통령, 38대 제럴드 포드, 41대 조지 부시, 42대 빌 클린턴, 43대 조지 W. 부시를 배출했습니다. 조지 W 부시의 선거전을 치렀던 민주당 캐리도 예일대 출신입니다. 부시는 68학번, 캐리는 66학번입니다. 이와 같이 예일대가 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원동력에 대해 리처드 레빈 총장은 “학생들이 하나의 팀에나 조직에 소속되거나, 리더가 되어 공통된 목표를 향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특히 개교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인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봉사를 신성하게 여기는 교풍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예일대 1학년이 머무는 올드 캠퍼스에는 미 독립전쟁 당시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는 말을 남기고 영국군에게 처형된 나단 헤일의 동상을 아침마다 보며 교실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처럼 예일대는 개인의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이익을 증진하는데 공헌해야 한다는 문화가 있고, 특히 교수와 선배들은 학생들에게“너희들은 지금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이 결코 공짜라고 여기지 말아라, 언젠가 너희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특권을 사회와 국가에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년에 4만 불 이상 학비를 내는 학생들은 취업박람회에서 모든 좋은 일자리를 뒤로한 채 평화봉사단, 해외 교육 봉사단의 부스 앞에 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자라고 공부했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선천적인 특징에 의해 지배받기 보다는 후천적인 환경 즉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 그리고 신앙교육에 의해 고쳐지고 발전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르시며 가르치고 지도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만들어가십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당신의 택함 받은 자녀들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마귀의 자녀, 욕심으로 가득 차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사람들을 괴롭게 한 야곱에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시는가를 알기위해 지난 5주간에 걸쳐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제하에 야곱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하나님의 지도를 받은 야곱의 노년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하고 변화되는 과정을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약 5단계에 걸쳐 일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기복적 신앙의 단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단계입니다. 이때의 모습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아서 젖을 먹어야 살 수 있기에 우는 행위가 생존 수단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소원 성취가 삶의 전부이며 하나님을 찾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활히 이루어 주시는 공급원으로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성령 충만한 것같이 보이나 뜻대로 안되면 금방 좌절합니다. 육적인 본능으로 살아가며, 자기 욕심을 채워 달라고 성경도 이에 관계된 것만 골라서 붙잡는 이기적인 신자입니다. 이 단계는 영적 성숙 단계에서 제일 낮은 수준으로서 혹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성도의 약 7-80%는 이 단계에 머무르고 있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거의 감당하지 못합니다. 야곱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팥죽을 통해 형의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의 야곱입니다.
둘째 단계는 율법 신앙의 단계입니다. 이는 종교의 틀에 매여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에 비유하면 이유식을 먹는 단계로서 주님을 좀더 알고픈 마음이 생기고 또 세상에 대한 열심을 바꾸어 종종 교회 일에도 참여합니다. 성경을 읽고 배우니 자신이 성스러워졌다는 기분이 들고, 주워들은 영적 지식을 진정한 자신의 영적 수준으로 착각합니다. 또 선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것을 바치기도 하고 봉사를 통해 자신의 선행을 쌓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빙자하여 타인을 판단하는 일을 자주합니다. 의인인채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신이 설정한 규율이 절대 기준에 모든 사람이 따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거기에 동의하셔야만 된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이 시기의 성도들은 자기가 만든 법에 억매여 자유함을 잃고 율법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특히 자신이 토해낸 판단, 타인을 향해 쏘아댄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 올 때는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핑계하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이 빠져 사방의 모든 길이 캄캄하게 막히는 답답함을 경험합니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만 바라보며 자신의 의를 깨뜨리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히 왕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사모합니다. 야곱의 경우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께 서원하고 밧단아람의 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굳게 약속합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겠으며, 벧엘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동안 밧단 아람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몰랐습니다. 삼촌이 잘못했고, 삼촌의 자식들 즉 외사촌들이 자신을 미워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삼촌을 피해 도망 쳤고,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군대의 보호를 받았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보호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단계는 십자가 신앙 단계입니다. 이는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갈2:20. 갈5:24)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기의 의를 버리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동안 살아왔던 고집이 쉽사리 항복하지는 않습니다. 열심의 대상은 세상일에서 주님의 일로 바뀌었지만 일을 하는 동기는 여전히 자기만족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든 나만 좋으면 좋은 것이고, 여전히 자기 고집이 살아있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 우리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로 인한 쓴잔을 실컷 마시도록 잠시 내버려두십니다. 이런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가 의지하던 것, 붙들던 것, 믿고 사랑했던 것 들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몸부림치는 와중에서 남의 잘못만 보던 중심이 변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허물과 부족이 십자가 밑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타인의 큰 잘못도 내 잘못에 비하면 작게 보이며,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피부로 느껴집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언어, 태도가 달라지고, 일을 하는 동기가 달라집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나의 유익을 먼저 추구하지 않고 남을 위한 배려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 주님의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온전히 자신을 죽이지 못해 조금만 한 눈을 팔게 되면 다시 2단계로 떨어 질 수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며 환도 뼈가 부러진 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깨달아 졌습니다. 그래서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겠다고 끝까지 붙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에서와 화해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자 다시 본래 야곱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잊은 채 세겜에서 땅을 사고 그곳에서 자기 맘대로 예배를 드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넷째 단계는 헌신의 신앙 단계입니다. 성숙을 이루는 순종의 단계이며, 하나님께 아낌없이 자신을 드리는 단계입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많은 연단의 광야를 통과했습니다. 지금부터는 모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지고 순간순간 사랑의 고백,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양심이 밝아져 깨달은 말씀은 당장에 실행에 옮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간사한 것이 인간인지라 좋은 것도 계속되면 무디어 지고 둔감해 집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느꼈던 감격의 순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되고 흥미가 없어진다. 다시금 안일에 빠져 영적 침체 위기가 찾아듭니다. 이때 디나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전단계인 ‘자아의 죽음’때, 즉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죽음의 위기를 맛보았을 때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결심했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이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체질을 바꾸는 훈련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 한도 내에서 죄에 물든 습관들을 하나님께 속한 성품으로 바꾸도록 도우십니다. 세겜에서 디나의 사건을 통해 벧엘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야곱은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도록 사면의 고을들로 야곱을 추격하지 못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 지금까지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자기 욕심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예배도 드렸으나, 이번 만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고 몸을 성결케하고 벧엘로 올라간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올라간 것입니다.
다섯째. 연합의 단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단계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단계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단계입니다. 수많은 연단과 인내를 통해 이제는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삶의 전부가 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른 성도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덕을 세우기에 힘씁니다. 자신의 가치를 부각하려고 몸부림치지 않고 함께 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불평의 사람이 아니라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충성의 사람이 되어갑니다. 믿음과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이적과 감동적인 일이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이웃과 형제들을 축복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기쁘게 감당합니다. 하나님과 마음이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기쁘게 감당합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스라엘의 삶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택함을 받았고, 우리가 이스라엘로 살도록 지도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에 보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상고하면,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벧엘에서 약속을 지킨 이후에야 비로소 밧단아람에서 돌아 온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벧엘로 올라가 예배를 드리기 전 까지는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진정한 이스라엘의 삶,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이스라엘로 기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창35:27에 야곱이 드디어 기럇 아르바 즉 헤브론에 이르러 그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정착한 곳이요, 이를 아버지 이삭이 물려받은 곳입니다. 야곱이 그곳에 도착 한 후 얼마 지니자 않아 아버지 이삭은 돌아가시고 그리고 지금까지 아버지 옆에 살던 에서는 야곱이 오자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나 에돔 즉 세일산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원했던 장자가 된 것입니다. 이 장자의 삶은 곧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고 그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왕처럼, 선지자처럼 그리고 제사장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즉 장자다운 삶은,
⑴ 자기 생각과 고집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모두가 은혜 받고 변화되어도 여전히 한두 가지 문제를 안고 삽니다. 야곱 또한 이스라엘 되는 은혜를 받았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인간적 욕망과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다른 아들에 비해 더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채색 옷을 입혔고, 이 일을 통해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팔려갔고, 야곱은 이 아들이 죽은 줄로 알고 크게 통곡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에게 곡식을 사러 보낼 때에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혹시 죽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42:4) 그러나 첫 번째 사온 곡식이 다 떨어져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자식들의 요구를 거절치 못하고 결국 베냐민을 애굽으로 형들과 함께 보내게 됩니다. 그때 야곱은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라고 고백합니다.이뿐 아니라 창46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자 고향을 등진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야곱의 지금까지의 삶을 살펴보면 야곱은 항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이동하고 정착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인생 가운데, “잃으면 잃으리로다”라는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던 단어입니다. 양보, 희생은 야곱의 사전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얻기 위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곱임을 볼 때, 이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모두는 곧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자신의 남은 인생, 베냐민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표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결정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보호와 인도를 받는 첩경은 순종입니다.
⑵ 온전히 예배하는 삶입니다.(제사장적 삶)
창세기 45장 28절, 즉 마지막 절에 보면“이스라엘이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이 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살아있고 더군다나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인 애굽의 제 2인자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기쁘고 감사한 소식을 들은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창46:1에“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 은혜를 베푸시면 마지못해 그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때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와 기쁨의 소식을 들은 후 먼저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 예배를 받으신 주님께서 나타나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창46:2-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과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발적인 예배하는 자, 받은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예배 자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르십니다. ⑶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삶입니다.(선지자 적인 삶)야곱은 언제나 욕심 부리고 심통 부리며 자기 맘대로 살다보니 판단력이 부족해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눈이 어두워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노년을 달랐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이 나이가 많아 어두웠으나(창48:10),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 할 때, 차자인 에브라임 위에 야곱이 오른손을 얹어 기도하려 하자 요셉이 아버지가 눈이 멀어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을 올려 안수하려는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자로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셉 지파는 원래 하나의 지파였으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즉 두개의 지파가 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에게서 빼앗은 것이며(창48:22), 실제로는 12지파 중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로서 12지파 중에서 제외되자 그 빈 자리를 요셉지파 중 에브라임이 채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는 오직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 왔고,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복을 원했으나,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뿐아니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난안 땅에 다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창48:21) 그렇습니다. 성도가 복을 받아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 성도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종말이 있고, 천국이 있고,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알리는 전도자로 사는 것입니다.
⑷ 타인을 축복하는 삶입니다. (왕적인 삶)
창47:7에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매”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약자입니다. 바로는 그 나라의 통치자입니다. 대개 약자가 강자앞에 서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히려 당당히 바로를 축복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그 앞에 일곱 번 절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는 에서보다 몇 배나 더한 권력과 힘을 가진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했습니다. 모든 믿음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 즉 이 세상을 축복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야곱은 항상 주는 자의 삶이 아니라 받는 자, 빼앗는 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변화된 이스라엘은 주는 자 베푸는 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는 자 베푸는 자 축복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그날까지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되도록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지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품고 비젼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하나님을 닮은 멋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원하신다면 나도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면 됩니다. 나 혼자하면 어렵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쉽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어쩌면 저와 그렇게도 같은지... 그런데 나중에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했고, 상상 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고, 거기에 자식까지 애굽의 총리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일어나라! 힘 내라! 내가 너를 도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입니다. 방법은 하나님의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그 예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나에게도 이런 기적과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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