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믿음의 능력(3)

믿음의 능력(3. 기쁨의 원동력)
롬5:1-11
제가 영국에서 선교사역 중 하나님의 은혜로 버밍험 대학교 살리오크 칼리지에서 선교학 공부를 통해 저의 영적, 지식적 성장에 큰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쁜 일정을 쪼개서 공부를 해야 했기에 월요일 아침 집을 출발해 점심때쯤 버밍험에 도착하여 학교에서 주는 밥을 먹고 오후부터 그 다음 날 오후까지 꼬박 하루를 그곳에 머물러 책과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물론 세끼의 밥과 하루 동안 머무르는 기숙사비는 학교 측의 배려로 무료였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부는 타 문화권에 가서 어떻게 예수님을 전할 것인가? 를 주제로 다룬 Mission and Culture였습니다. 그때 교과과정 중 잠시 타문화 이해를 돕기 위해 소개받은 책이 바로 선교사 단 리처드슨 (Dan Richardson)이 자신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쓴 화해의 아이(Peace Child)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도네시아 이리얀 자야 섬의 사위 부족은 진정한 우호 관계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배반과 살인만이 그들이 따라야 할 길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와네스'라 불리우는 이 풍습은 배반을 사회적 의무로 여기는 아주 악한 풍습이었습니다. 다만 서로의 아이를 상대 마을에 '화해의 아이'로 주는 것을 통해서만 평화가 지켜질 수 있지만 그것도 열악한 기후와 비위생적 생활환경 속에서 그 유약한 아이의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리처드슨 부부가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 부족 사람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진료를 해주는 섬김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변 부족들이 도움을 얻기 위해 이 마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 식인종 부족들 간에는 다툼과 살인이 끊이지 않았다. 계속되는 다툼과 살인을 보다 못한 선교사 부부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사위 부족은 밤샘 회의 끝에 다른 부족들과 화해하기로 결정하고 선교사 부부에게 그곳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다른 부족들과 화해하기 위한 의식에 참석한 리처드슨 부부는 깜짝 놀랐다. 그들 식인종 부족의 화해 의식에는 그 부족 리더의 가장 사랑스런 막내아들을 상대 부족에게 내주는 의식이 행하였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peace child'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리처드슨 부부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화평을 위해 보내주신 'peace child'라는 사실을 전함으로 그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이 책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전쟁과 보복에 종지부를 찍는 화해의 사신이요, 화해의 제물 즉 화목제물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왔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화목은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한 예화를 통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숭의 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김 동호 목사가 쓴 로마서 강해집 “예수만 의지하는 사람” 238페이지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이가 새총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폼을 잡아도 잡을 새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가 집에서 기르는 거위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험 삼아 한번 쏴 봤는데 아주 정통으로 맞아 그만 거위가 죽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거위를 쏴 죽인 것이 죄입니까? 그것은 실수지 죄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귀히 여기는 거위지만 그 거위를 쏴 죽였다고 죄인으로 취급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서 죽은 거위를 마당에 파묻었습니다. 거위를 파묻은 것은 실수입니까, 죄입니까? 죄입니다. 죄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거위를 찾았습니다. 거위 못 봤니? 몰라요. 아이는 시침을 떼었습니다. 이것은 죄입니까? 큰 죄입니다. 이 죄가 즉시 아버지와의 화평을 깼습니다. 그 아이가 죄를 지어 놓고도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하면서 매달릴 수 있겠습니까? 슬금슬금 눈치보고 피해 다녔습니다. 가능하면 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와의 화평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마음씨가 아주 고약한 일하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렀어요. 아무개야! 왜요? 너 우물에 가서 물 좀 길어 와. 그것은 아주머니가 할 일인데 왜 날 시켜요? 너 거위 죽이고 땅에 파묻었지. 아주머니가 거위 파묻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그 약점을 이용해서 아이에게 추운 겨울날 우물가에 물을 길러 보냈습니다. 아이는 물을 길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 아이 부모가 없으면 일하는 아주머니가 아이를 불러서 집안의 허드렛일을 시키고 자기는 앉아서 쉬었습니다. 아이는 꼼짝없이 발목이 잡혔습니다. 죄의 약점을 잡히면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지으면 종이 됩니다. 주인집 아들이 일하는 아주머니의 종이 된 꼴입니다. 죄는 종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일을 시켜야 할 종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이는 너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아이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매 맞을 각오를 하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사실은 제가 거위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겁이 나서 파묻고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야, 이놈아 다 알고 있었다. 아빠가 거위를 귀히 여기지만 거위가 중하냐? 네가 중하냐?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사람은 누구나 잘못하고 실수할 수 있는데 그것을 숨기면 그렇게 고통스럽단다. 너 아주 좋은 공부했다. 죄를 숨기니 힘들었지? 다시는 그러지 마라.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는 얼마나 신이 났을까요? 그것이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202장) 이 찬송을 그 아이는 다 깨달았을 겁니다. 죄에서 자유 함을 얻은 후 그렇게 무겁던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습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찬송가 183장) 아주 기쁘고 자유스러워서 아버지에게 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또 심부름을 시킨단 말입니다. 물 떠오너라! 떠오겠어요, 안 떠오겠어요? 너, 말 안 들으면 알지? 하고 협박해도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으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1. 믿음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조성한다.
여기서 화평이란 곧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 했는데, ‘들어감’은 첫째. 왕(어전) 앞에 안내를 받아 들어간다는 뜻과 둘째 배가 항구에 입항 할 때, 예인선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예수님의 안내를 받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천국이라는 항구로 들어가도록 이끄는 예인선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화물을 가득 실은 큰 배가 항구 앞에 이르면 일단 엔진을 끄고 멈추어 섭니다. 이때 항구에서 작은 예인선이 나갑니다. 큰 화물선과 작은 예인선 사이에는 굵은 밧줄이 연결되어 작은 배가 끌고 들어와 항구에 정박시킵니다. 과연 이 작은 배가 큰 화물선을 끌 수 있을까? 의아해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인선은 규모는 작아도 강력한 추진력을 갖고 있는 특수한 배입니다. 예수님도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화해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인도되어 그 하나님을 대면하고 서서 화평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평의 복의 효력은 어디까지 미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하나님과 하평의 복이 오직 천국에서만 발휘되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구원은 미래적 차원이 포함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놓으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현재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은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지금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기쁨 즉 즐거움을 가지고 온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기쁨을 샘솟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3)고 했습니다.
2. 믿음은 기쁨을 창조한다.
본문2절에“"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하는 즐거움과 둘째는 영원한 천국 즉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소망하는 즐거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는 현재적 영광과 미래적 영광이 있습니다. 현재적 영광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면서 사는 즐거움이고 미래적 영광은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자녀로서 즐기는 즐거움은 임마누엘의 기쁨이고, 천국에서의 기쁨은 여호와 이래의 기쁨입니다.
3. 현재적 영광을 누리며 기뻐하라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임'은 '함께' '마누'는 '우리''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be with us). 주님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지금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자의 삶을 누리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줍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4절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승리자로 만들어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서 가장 크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안에 들어와 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이 권세는 첫째. 생명을 살리는 권세입니다.
요5:21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들의 권세를 받으면 영이 살고 마음이 살고 육이 살게 됩니다. 또 롬8:1에서는"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생명 살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우리가 입을 열어 말씀을 증거 할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자는 영혼이 깨어나고 병든 영혼이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둘째. 맺고 푸는 축복의 권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적 권세, 그것은 무엇입니까? 마16장에 보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마16:19에 보면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는데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맺고 푸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복을 비는 축복권입니다. 축복의 반대는 저주입니다. 저주는 남이 잘 안 되길 비는 것입니다. 마귀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반면에 축복은 말 그대로 복을 빌어 주는 것입니다. 영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은 이 축복권을 사용해서 세상을 구원하고 복되게 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민수기 6장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이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이런 축복을 해서 복을 받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니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B.C.605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1차 예루살렘 침공 때 어린 청소년 시기에 포로로 끌려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기위해 왕이 하사하는 이방신에게 바친 제물로 쓰였던 기름지고 좋은 음식을 마다하고, 채식을 하였습니다.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금 신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다가 풀무불속에 들어가는 고난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흐트러짐이 없이 하루에 3번씩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고, 그래서 사자굴속에 던져지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7명의 왕을 거치며 5번이나 국무총리를 지냈던 다니엘은 신앙과 세상 지위 모두를 공유하면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그가 단9장에 보니 성경을 읽다가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며 금식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자 그의 기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셋째. 모든 환란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권세입니다.
본문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환난은 육체적인 고통이요, 물질적인 어려움이며, 사회의 냉대와 같은 어려움입니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앞에 곤고합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이제는 끝이라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 가운데 요셉처럼 다양한 인생 경험과 고난을 당한 사람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역경을 상징이라도 하듯 그는 신분이 바뀔 때마다 옷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4번이나 인생의 옷을 바꾸어 입었던 사람입니다. 채색옷, 종의 옷, 죄수복, 총리의 옷까지 참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⑴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아 위로 형들이 입어보지 못한 색동옷을 입었으나, 형들의 미움으로 색동옷이 벗겨지고 종의 옷을 입어야 했고, ⑵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모함으로 종의 옷이 벗겨지고 죄수의 옷을 입어야 했으며, ⑶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수의 옷이 벗겨지고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화려한 관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채색 옷은 아버지가 입혀 주셨고, 종의 옷은 보디발이, 죄수의 옷은 보디발의 아내가, 총리의 옷은 바로 왕이 입혀 주었습니다. 참으로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미움 받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 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귀한 집 아들에서 종이 되었기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종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었기에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당시 세계 최고의 나라인 애굽의 제2인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꿈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 올라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판,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했습니다. 섬겼습니다. 왜요, 자기가 당해보니 너무 힘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해 본 사람이 가난한 사람 사정을 압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을 당하시고 계십니까? 성도의 고통은 고통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난으로부터 해방과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잠시 경험하는 것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잠간의 고난 후 주님은 반드시 부활의 능력으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현재 고난 중이 있는 형제자매 친구 이웃을 섬기도록 복을 주십니다.
어떤 부인이 동네에 채소가게를 열었습니다. 가게가 너무 잘 돼서 사람들이 시기합니다. 하루는 남편이 와서 "여보, 우리 가게가 너무나 잘 돼서 다른 가게가 망하게 생겼소. 그러니 더 이상 가게 확장도 하지 말고 물건도 더 들여 놓지 말고 우리 가게에 없는 것은 다른 가게에 소개를 합시다."라고 제의를 했습니다. 가게가 한가해 지자,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 남는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쓴 글이 바로 삼포능자(미우라 아야꼬)의 유명한 ‘빙점’이라는 소설입니다.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며 수 백 만부가 팔려 나갔고 이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가 욕심을 부렸다면, 돈을 많이 벌어도 슈퍼마켓 주인밖에 더 하겠습니까?
4. 미래적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은혜요, 즐거움입니다. 섬기고 사랑하며 꾸어주어도 잘 되는 복, 이 복을 누리며 살라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은 올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은 구체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로 살 수 있도록 주신 은혜 앞에 감사하며 또 다른 하나는 마치 농부가 봄에 심은 곡식을 모두 추수해서 창고에 들인 후 축제를 벌이듯이 이 땅에서 우리의 일생을 마치면 영원한 천국 창고에 알곡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며 벌이는 축제가 곧 추수감사주일인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하는 곳입니다.(눅16:9) 대접받고 위로받는 곳입니다.(눅6:21) 특별히 계시록 21장에 보니
⑴ 천국의 건축 재료는?,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등 각종 보석으로 지어졌고,
⑵ 그 길은?,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더라”(계21:21),
⑶ 정원은?,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⑷ 천국 생활은?
① 세상적인 제약과 속박이 없는 곳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21:4) ② 더 이상 저주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22:3) ③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④ 천국은 상급을 누리며 사는 곳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해서 핍박받고 헐벗고 고난당하며 불이익을 당한 모든 것을 보상받는 곳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렇게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믿는 믿음, 이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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