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3) - 브니엘의 하나님

브니엘의 하나님본문/창32:22-30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이는 입신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중국 육조(六朝)시대 양(梁)나라의 유지린 이란 사람이 남군 태수로 승진했을 때 무제(武帝)는 이렇게 격려했습니다.“그대의 모친은 연세가 많고 덕망도 높으니 ‘그대에게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令卿衣錦還鄕 영경의금환향)’ 마음껏 효도를 할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와 대조적인 말로 錦衣夜行(금의야행)말이 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다라는 뜻이므로, 아무 보람도 없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들이닥친 항우(項羽)는 한 걸음 앞서 입성해 있던 유방(劉邦)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유방은 아방궁을 비롯하여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보존한 채 항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유방이 살려준 진왕 자영을 죽이고 아방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미녀들을 끼고 연일 술잔치를 벌이는 한편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고 금은보화를 약탈했습니다.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항우에게 ”함양일대는 산과 강으로 둘러싸이고 토지도 비옥합니다.여기에 도읍을 정하신다면 천하를 호령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하중 한 사람이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폐허로 만든 함양이 눈에 들지 않았고, 또 한시 바삐 고향에 가서 자신의 출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항우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항우는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 걸치고 밤길 걷기錦衣夜行)지’”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금의환향하고 싶습니다. 금의환향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가 출세를 해야 하고 또 이를 반겨 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야곱이 20년 만에 돈을 많이 벌어 금의환향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그가 20년 전에 뿌려놓은 씨 때문입니다. 법보다 주먹! 말씀보다 내 생각!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가 받을 축복을 가로챈 후에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의 약속대로 많은 복을 받아 고향인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평생을 두고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쌍둥이 형 '에서'의 노여움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32:3-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무섭고 떨렸습니다. 그러자 이를 해결하기위해 야곱은 다시 또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형에게 줄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위하여 준비한 예물은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14-15절)이었습니다. 이를 그냥 한 번에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앞서 보낸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자기가 대면하려는 꾀를 부렸습니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지만, 또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뭔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야곱은 시도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예물을 들고 갈 때에도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16-20절)라고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자신의 재산 전부를 반으로 나누어 만약 형 에서가 자기를 치면 나머지 반만이라도 건질 계획을 세웠습니다.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자는 것입니다. 법 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20년 동안 예수님을 믿은 야곱이었지만, 위기를 만나고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 보다는 인간의 생각이 앞섰습니다. 홀로 있을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방법을 총동원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습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자다 말고 일어나 가족들을 깨워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냥 홀로 얍복 강가에 남았습니다.(24절) 야곱이 기도하기 위해 홀로 남았을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불안에 떨며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야곱을 찾아 왔습니다. 본능적으로 야곱은 에서가 보낸 자객이라고 착각하고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몸부림 쳤습니다. 그렇다면 이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을 찾아와 야곱과 씨름한 사람은 하나님 사자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자는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 즉 신약에 오실 예수님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으로 외롭게 홀로 강가에 머물러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매를 맞아야 깨닫는 인간이에 대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그는 태중에서 그 형의 발꿈치를 잡은 자요 자기 힘으로 하나님과 겨룬 자라. 그는 천사와 겨루어 이겼으며 울면서 그에게 은혜를 구하였다”(호12:3,4). 야곱은 태중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택하신 자이며 이 사실을 어머니 리브가를 통해 알리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상속자로 세우시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 힘”으로, 타락한 인간의 지혜와 술수로 상속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형의 시장기를 이용하여 팥죽으로 장자권을 빼앗으려 하였으며 아비 이삭을 속이고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20년 밧단아람에서 삼촌에게 열 번이나 속고 수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얍복 강가에서의 씨름은 자기 힘으로 축복을 쟁취하려 하여 하나님과 다투고 싸우는 야곱의 생애를 대표하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자기의 힘, 자기의 부패한 성품을 고집하다 천사로부터 환도뼈(엉덩이 뼈)를 얻어맞고 무력한 자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나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야곱은 울면서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 힘으로 이루려던 교만과 자기 신뢰를 버리고 회개의 눈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세가 된 것이다(호12:4). 이러한 사실이 “나를 축복하시기 전에는 내가 주를 놓지 아니하리이다”라는 간절한 호소로 표현 되었습니다.(창32:27).울면서 은혜를 구하라야곱은 이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했습니다. 이 씨름 중에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졌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렸습니까? 더 이상 약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야곱은 형이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를 데리고 도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환도뼈가 부러졌으니 도망 갈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야곱은 아픔을 견디며 새벽이 되도록 끈질기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의 패배,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루려 하던 자기 신뢰의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힘과 계획이 무능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울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뭔가 믿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야곱과 같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참된 복을 구하라야곱과 씨름하던 천사가 날이 새려하니 야곱에게 나로 가게 하라고 말했는데 이 때 야곱의 대답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 라고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무언지 축복해달라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복은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건강도 아니었습니다. 가정이나 자녀들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재산을 모을 만큼 모았지만 진짜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자기가 그렇게 소원하던 여자를 그토록 어렵게 아내로 얻었지만 진짜 행복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 인줄 알았는데 복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야곱이 이렇게 매달리고 축복해달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진짜 복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진작 깨달아야했습니다. 진짜 복을 받아야지 복처럼 보이는 가짜 복을 받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야곱이 이렇게 진짜 복을 받아야하겠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구하자 그 대답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라고 물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수가성 여인과 대화 중에 “주여 내게 영생의 물을 주어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라고 여인이 말하자 그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고 하셨던 부분과 매우 흡사합니다. 동문서답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진리와 복이 담겨 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여러분, 이제 잘 보십시오. 야곱과 씨름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이름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묻는 이유는 자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부르면서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이 짧은 한 마디, 그러나 그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는 하나님의 질문은 "너는 누구냐"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아들로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보다 앞서 태어나기 위해 나면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야곱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 혹은 밀어내다’ 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의 내면에는 ‘속이는 자, 거짓말쟁이’ 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처럼 그는 늘 욕심 부리고 속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밧단 아람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아내도 얻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환도뼈가 부러지고 보니 자신이 너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속이는 자입니다". "헛살았습니다!". "잘못 살아 왔습니다!". 라고 자신의 현 상태를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죄악과 허물로 인하여 심히 탄식하고 슬퍼했습니다. (이사야-사6장, 모세-출3장, 베드로 -눅5장)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야곱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악 된 삶을 살아온 존재이며,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물어볼 겨를이 없이 또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복을 받아야하겠다는 생각만으로 속임수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야곱처럼, 우리는 스스로 속이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투쟁하면서 죄악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된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우리의 본성을 고백하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야곱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복은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연한한 존재이며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온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아니다 이제는 내가 너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리라" (28절)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닫고 얻은 새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더불어 싸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첫째.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거짓되고 죄악 된 삶을 살아왔음을 발견한 후 야곱은 이제 더 이상 속이는 자, 거짓된 인생을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습관을 따라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거짓된 성품으로써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선언 받은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또 다른 뜻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의 삶을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유익만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심을 믿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옛 사람 야곱은 죽었습니다. 새 사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인생이 그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혼자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피 흘리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속이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싸워주시고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야곱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자기 생명이 보전되었다"(30절)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대면하여 만나주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본성을 깨뜨리셨습니다. 그의 무기력함이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거대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잡힌 자신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본래적인 힘, 환도뼈가 꺾인 것을 느끼자 오히려 담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워주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힘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펼쳐질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아서 그의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환도뼈를 다쳐서 다리를 절면서도 기쁨이 넘칩니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에서'도 무섭지 않습니다. 할렐루야!사랑하시는 여러분본래 우리는 멸망을 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과 불행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멸망 받을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거짓되고, 허물 많고 죄악 된 우리의 옛 사람은 죽어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사람들입니다(롬6:6,1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요5:24, 롬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고후5:17).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싸워 주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혼자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혼자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혼자 외롭고 힘들게 싸우시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시고 여러분 삶의 많은 역경과 싸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거듭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서 주인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사람과 씨름할 것이 아니라, 세상과 씨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복을 받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재산도, 건강도, 자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위기도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다가 천국에 이르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평강과 도와주심과 인도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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