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5) - 엘벧엘의 하나님

나를 기르시는 하나님(5.엘 벧엘의 하나님)
본문 / 창48:15-16. 창35:1-15

저는 결혼 후 약 12년간 한국에 살았습니다. 3년은 부 교역자로 그리고 9년은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 12년 동안 이사를 무려 18-19회 정도 했습니다. 수 없이 많이 해서 그 수를 정확히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한해 3번 이사 한 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이 가까운 형제나 친구의 죽음이고, 그 둘째가 이혼이며 셋째가 이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1년에 한번도 아닌 두 세 번씩 했으니, 아내가 도망가지 않고 곁에서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이사를 할 때 마다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 하고 싶어도 염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마음을 표현할까 싶어 고민하고 있던 중 아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장인어른의 유품인 족자 한점과 아직 표구하지 못한 서예 작품 두 점이었습니다. 장인께서는 장기간 당뇨로 고생하시면서 이를 이기시기 위해 서예를 하셨습니다. 일본에 가셔서 전시회를 여실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셨던 분입니다. 오랜 병상에서 많은 유산을 남겨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신 장인께서는 모든 자녀들에게 당신의 작품 한두 점씩 유산 대신 남겨 주셨고, 아내도 이를 매우 귀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내인지라 결혼 후 1년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매우 그리워했고, 그래서 아버지께서 유품으로 남기신 그 작품을 귀하여 여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사를 시작할 때면 언제나 이 족자와 아직 표구하지 못한 나머지 작품들을 제일 먼저 챙겨서 안전한 곳에 두곤 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사랑한다는 저의 마음을 전하는 표시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작품 중에 특히 제가 좋아했던 것은 春(춘)不(불)耕(경)種(종)秋(추)後(후)悔(회) 즉 봄에 종자를 갈지 않으면 가을에 후회한다. 는 글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매우 연약합니다. 그래서 후회를 잘 합니다. 중국의 주자는 뒤늦게 후회하지 말라는 뜻에서 주자 10회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不(불)孝(효)父(부)母(모)死(사)後(후)悔(회) -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 少(소)不(불)勤(근)學(학)老(노)後(후)悔(회) - 젊어서 부지런히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한다. 安(안)不(불)思(사)難(난)敗(패)後(후)悔(회) -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 치 않으면 실패한 뒤에 후회한다.』이뿐 아니라 사람은 불편을 느껴야 변화를 추구하고 발전을 꾀합니다. 인간이 발견한 모든 발명품은 불편을 느끼는 순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이 밭 갈고 논을 갈 때 사람이 직접 멍에를 메고 갈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말과 소를 훈련시켜 밭을 갈아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소나 말에게 멍에를 씌워 짐을 땅 바닦에 질질 끌고 다니게 해서 운반을 했습니다. 처음엔 좋았는데, 소가 힘들어 하자 나무로 바퀴를 만들었고, 나무 바퀴가 돌에 부딪혀 잘 깨지자 바퀴 가에 철판을 대었습니다. 좀 빨리 달릴 수 없을까? 좀 많이 실을 수 없을까? 연구한 끝에 자동차가 발명이 되었고, 나무 바퀴로 달리다 보니 너무 불편함을 느낀 던 롭이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은 타이어를 발명하였습니다. 핸들이 너무 무거워 유압을 이용한 파워 핸들이, 사고가 나면 산산 조각으로 변하는 유리가 나왔습니다. 안전밸트, 에어백 등 모두는 사용 중 불편함을 느껴 좀 더 편리 할 수 없을까? 좀 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까? 하는 데서부터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변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나의 삶에 만족하기 보다는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더 인간의 약함을 생각해 본다면,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습니다. 목사의 눈에, 부모의 눈에 문제가 보여 성도들에게, 자녀들에게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해도 그 때는 잔소리로 듣습니다. 괜히 남의 생활에 간섭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고 나면 그 때가서 “아! 이런 일이 있을까봐 그렇게 말씀 하셨구나!”라고 깨닫습니다. 문제와 고난을 당한 후에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연약함입니다. 자식들은 돈 떨어져야 부모에게 연락합니다. 오죽 했으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을까요? 사람은 문제가 생겨야 하나님을 찾는, 조금은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와 정 반대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좋은 하나님이신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항상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창34:1-2에 보니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고 욕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제 가나안 땅에 입국하여 여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쉬려는 참에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이 양을 치고 돌아오자 이 사실을 이야기를 했고,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를 폭행한 세겜에게 세겜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행하면 디나를 그의 아내로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할례는 히브리 백성으로 선민 됨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9-1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외적인 증거가 할례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인치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하나님의 계약을 남용하고 또 오용하고 있습니다. 창34:15-16에 보니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베푸는 것인데 돈으로 산 바도 없는 이방의 세겜 족속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이는 디나와 결혼을 전제로 한 족장 간에 통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권한 남용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이방인과 결혼을 위해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할례는 양피를 베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위한 세례를 받기까지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세례가 할례를 대신했으므로 세례를 통해서 할례가 종식된 것입니다. 이 세례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부활 사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피 흘리는 속죄적인 행위로 계약의 백성이 되는 언약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그 자녀들은 할례를 통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을 합법화하려는 시도를 했고,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살인 행위를 행했던 것입니다.(창34:25-27)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할례를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형 사고가 발생하자 주변에 살고 있던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들이 보복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모든 야곱의 가족들이 전멸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35:1)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20년 동안 야곱을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이 좋아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세겜에 살다 이런 변을 당한 것입니다.
왜 야곱은 하나님과 약속을 잊고 세겜에 머물러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 다 이루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전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고, 또 빌2:13에서는“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햇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 성도들은 천국 가는 그날까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장 큰 장애물인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던 칼을 버리고 그 대신 뜨거운 포옹으로 화해를 청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아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구나!’ 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의 신앙 여정은 밧단아람에서 출발하여 가나안 땅 벧엘을 지나 천국까지 이르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려면 넘어야 할 산과 강 문제 등 크고 작은 장애물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미스바(갈르엣 혹은 여갈사하두다)는 그 일차 관문입니다. 그는 그 어려운 힘든 과정을 하나님의 군대의 도움으로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그 다음 코스는 바로 얍복나루였습니다. 그의 생애에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정말 힘든 관문입니다. 그는 그곳을 통과하면서 환도 뼈까지 위골되는 아픔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브니엘의 영광을 체험하며 얍복 강을 통과하였습니다. 이제 야곱의 세번째 관문은 세겜입니다. 이곳은 너무도 쉬운 곳입니다. 작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문제에서 승리하고 작은 문제에서 넘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에서는 승리하였지만, 그 보다 훨씬 작은 아이에서는 실패했습니다. 마음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쯤이야 라고 쉽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 되었고,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긴장을 놓게 됩니다.
둘째. 약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창34:13-17에 보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야곱이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먼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은혜를 체험했을 때 에서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서 미움과 복수심을 다 제거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의 화해를 통해서 그가 20년 동안 고민하고 불안해했던 묵은 체증이 씻어졌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화해를 함으로 영적 긴장이 풀리게 되었고 좀 쉬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가 지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가족들도, 종들도, 모든 가축들도 장거리 여행에 지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곳에서 얼마간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숙곳에 살다보니 그 근처에 잇는 세겜 성이 더 살기 좋아 보였습니다. 세겜은 땅이 비옥하고 문화도 발달된 곳이어서 야곱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세겜 성 근처로 이사하기 위해 집 지을 터와 동물들을 가둘 수 있는 농장 터를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샀습니다. 그는 세겜도 가나안 땅이므로 이제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자기 합리화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곳에 정착하고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곳 생활에 푹 젖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푹 빠지다 보니 그는 20년 전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은채 약 10년 그곳에서 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세상에 취해 있는 중에 디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야곱이 도망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셔서 저를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3가지 서원을 했습니다.(창28:20-22) ① 하나님을 평생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습니다. ② 이 벧엘에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 ③ “지금은 빈손이지만 앞으로 저에게 물질이 생기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제가 반드시 그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십일조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벌었다고 생각하면 아까워서 십일조 못 드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면 십일조 드릴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 서원을 가장 힘들 때 답답하고 고독할 때 두렵고 떨릴 때 하나님 앞에서 했습니다. 그랬었는데 그 후에 야곱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약속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생각이 날 때에는 약속 이행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뤘습니다(창33:18-20). 그것은 사람이 서원을 지키지 않게 되면 그것이 곧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23:21에 “서원한 것은 갚기를 더디 말라 더디면 네게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해 주셨습니다. 그로 평안히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창33:18)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 불상사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디나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젊은 세겜 추장의 절제할 줄 모르는 욕정에 그 근본 원인이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벧엘 서원 불이행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더 큰 재앙을 피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그 약점과 허물을 덮기 위하여 또 다른 속임수를 쓰면 더 깊은 수령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야곱은 계약의 불이행으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회개하고 일어서면 더 큰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인데 이 허물을 은폐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보복하려고 하다가 더 큰 낭패를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약을 불이행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약을 남용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 사건을 잘 압니다. 탕자 생활을 청산하는 유일의 길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내 맘대로, 내 편의대로의 예배 때문입니다.
창33:18-20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의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세겜 성 근처에 땅을 사고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나름대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곳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강하시다(전능자)는 뜻입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있어야 할 자리,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할 장소는 세겜이 아니라 벧엘이어야 합니다. 벧엘에서 약속을 해 놓고 지나고 나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억했다 할지라도 자기 편한대로 자기 유리한쪽으로 세겜에 안주하면서 육신적인 편의를 쫓아 생활하면서 약간 마음이 거리낌이 생기니 그곳에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신데,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 중요하지 그러니 어디에서든지 정직하게 예배드리면 받으시지 않을까? 이렇게 자기 편리로 예배하고 결정해서 살아가는 야곱에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내 중심, 내 편리가 아닙니다. 왜 아벨의 제사는 받았는데 가인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4:7)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행위에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벗어난 그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은 인정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귀하게 여기신 것은 바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했을 때 사흘 길을 걸어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 모리아로 가서 거기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예비하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 말씀 즉 약속에 근거한 예배, 교회 중심의 예배를 우리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과 약속하고 성도들끼리 무언의 약속을 통해 모이는 이곳, 주일 낮 이 시간에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시고, 이 시간에 만나 주십니다. 주님은 이곳 이 시간에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의 예배를 청산해야 합니다.
내 만족의 예배, 액땜 예배, 내 편리한 대로의 예배는 우리 곁에서 과감히 몰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지도 않고 세겜에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세겜이란 세상이며 세속화된 종교를 상징합니다. 세겜은 음란과 무질서의 도시였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던 곳이 세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합리화하는 곳이었습니다. 세겜은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 즉 성도들이 살 곳이 못됩니다. 눅 15장에 보면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세상 즉 세겜과 같은 곳에서 자기 맘대로 살았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완전 거지가 될 때까지 놀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을 떠난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라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 어떤 실수도 다 용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2. 하나님께 갈 수 있도록 막힌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과 약속 장소인 벧엘로 올라가서 20년 전 약속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꼭 주변의 가나안 족속들이 뒤를 좇아와서 죽일 것 같았습니다. 이 사실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식구들과 가축들이 벧엘로 올라 갈 때 하나님께서 주변 고을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셔서 감히 야곱의 일행을 가로 막고 시비를 걸거나 공격을 하거나 재물을 빼앗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 하나 방해 하는 일이 없이 야곱 일행은 순적하고 평안하게 벧엘까지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5)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요14:6)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의지하여 언제라도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4:16) 3. 위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 제일교회는 만복의 근원 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복을 주신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교회 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벧엘로 올라가...하나님께 단을 쌓으라” 30 여 년 전에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 30년 동안 야곱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기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 만나기 위해 야곱은 순종을 결심했습니다. 30년 전에에는 혼자였으나, 지금은 온 식구와 더불어 올라갔습니다.
야곱은 식구들을 벧엘로 데리고 가기 전에 먼저 3 가지 면에서 예배를 준비했습니다.첫째. 이방 신상을 버렸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라헬도 친정에서 훔쳐온 드라빔을 버렸고, 야곱의 종들(30:43)도 자신들의 우상을 버렸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말씀보다, 은혜보다 더 좋아하는 세상의 것이 우상입니다. 둘째. 자신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야곱은 식구들에게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더럽혀진 마음과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셋째.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그것은 곧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 자신을 향한 자성(自醒)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았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의 신앙생활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여호수아의 고백 같은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생활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죄악의 걸음, 부정했던 걸음, 세속적인 걸음, 자기만을 위한 걸음을 돌려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의복을 바꾸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첫 번째 아담의 옷을 입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새 옷 즉 흰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의 가족은 벧엘에 도착하였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하며 두려워 떨며 들에서 돌을 베고 잘 때, 하나님께서 꿈에 생생하게 나타나셔서 축복하신 벧엘에 30여년 만에 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축복하신대로 큰 복을 받아가지고 그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엘 벧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살아야 내 영이 살고, 삶이 삽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자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 4가지의 복을 주셨습니다. ①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10절) ② 너는 번성하여 민족을 이루라(11절) ③ 네 후손 중에 왕들이 나오리라(11절) ④ 이 땅을 너와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13절).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마음과 몸을 드리는 기쁨의 예배를 드리시므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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