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1)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는 법(1)
고전10:1-11
루마니아의 소작 농부 모리츠는 개인적으로 감정을 가진 한 헌병의 조작으로 공문서에 유태인으로 기재된 것이 화근이 되어 사랑하는 처자를 떠나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구경 지방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도중 헝가리로 탈출한 모리츠는 적국 루마니아 사람이라 하여 체포돼 다시 수용에 수감됩니다. 이곳에서 탄약 한 상자와 맞 바뀌어 나치 독일에 팔려 강제로 공장 노동을 하게 됩니다. ‘기계는 완전무결한 노동자다’는 구호아래 기계와 경쟁시켜 일을 시키는 공장에서의 통제된 생활을 견딜 수 없어 2차 대전 중 연합군 지역으로 탈출합니다. 그러나 연합군 쪽에서는 적국의 군인이라 하여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다시 수감되고,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됩니다. 징역을 살고 난 모리츠는 유태인으로 체포된 13년 만에 처음으로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마중 나온 처자와 유럽에서 재회의 기쁨을 나눕니다. 모리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룻밤을 지낸 그 다음 날 소환장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서 유럽에 사는 모든 동 유럽인은 모조리 감금, 강제 송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유를 맛본 지 겨우 18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는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가 강대국 틈에 낀 약소국 루마니아의 고난과 숙명을 줄거리로 하여 서구 문명을 고발한 대표작 「25시」의 대략의 줄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도 모리츠처럼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와 눈앞에 다가와 자꾸만 우리에게서 희망을 빼앗아갑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은 낙심하고 절망 할 일만 계속 펼쳐집니다. 24시는 절망의 시간입니다. 24시는 인간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의 시간인 25시가 시작됩니다. 이 25시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24시가 불신앙을 상징하는 시간이라면 25시는 믿음을 상징하는 시간입니다. 이 예수께서 광야와 같은 험한 인생길에서 인간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당신의 거룩하신 영광을 나타내 주십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행진을 하는 가운데 능력과 권능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아니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보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많은 사람이 실패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이 사실을 교훈 삼으라고 하십니다. 지금 광야와 같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거울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거울삼아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는 법을 배우시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
1.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7절에“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고 춤추며 뛰 놀았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말씀입니다.(출32:1-6) 이들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간 사이 그 새를 못 참고 자기들이 가지고 잇던 금패물들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이 금송아지는 아피스를 말하는데, 이는 소의 형상을 가진 신으로서 이집트 전역에서 널리 숭배 받았습니다. 이 소는 미래의 징조를 가르쳐준다는 일종의 예언의 신입니다.(예컨대, 로마 장군이며, 정치가였던 게르마니쿠스가 독살당하기 조금 전에 던진 음식을 소가 먹으려 하지 않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힘이 세면서도 온순하고, 밭갈이에 필수적인 동시에 고기 맛도 뛰어난 황소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일찍부터 `힘과 다산'을 상징하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대부분 지역에서는 황소상을 만들어 상징적으로 숭배 했지만,이집트에는 살아있는 황소를 별도의 신전에 모셔놓고 숭배하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습니다.`아피스(Apis)'라 불리는 이집트의 황소는 일단 제사장들에 의해 간택되면 멤피스의 신전에서 죽을 때까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신으로 숭배됐고, 천둥번개가 칠 때 수태된다는 아피스의 어미소도 특별히 `이세움'이라 불리는 신전에 모셔졌습니다.아피스는 검은 수소들중에서 뽑히는데 특히 이마에 마름모꼴의 무늬가 있는 황소를 선호했습니다.아피스 황소가 죽으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미라로 만들어 지하묘지에 안장했습니다.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출애굽기 32장4절)이라 부르며 그 앞에 제사를 지내고 춤추며 노래한 것은 이 금송아지가 자신들의 장래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금송아지가 자신들의 앞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먹을 것과 입일 것을 책임져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애굽에서 430년간 사는 동안 애굽사람들이 이 아피스를 섬기는 일을 자주 보았습니다. 아니 그들도 애굽 사람들과 같이 아피스를 섬겼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은 했지만, 애굽의 습관과 애굽의 삶의 방식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을 때,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각종 언약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온 이유가 말씀으로 훈련받기 위함이며, 또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고, 말씀을 배우고 말씀에 순종할 때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었습니다. 말씀이 최고요, 말씀이 전부이여,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 광야입니다. 말씀이 물이요, 말씀이 생명이며, 말씀이 길이고, 말씀이 진리입니다. 오직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제일 주의, 물질 만능주의, 자기들 소견에 옳은 데로 행하려는 운동이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유전과 사상을 절대시하여 말씀을 대적하려는 시도가 왕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교회 다니는 것 말고 달라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습관, 세상 방법, 내 고집, 내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점을 말씀을 통해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생각을 교회에다 적용하려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금송아지 신앙입니다.
광야는 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광야는 애굽의 방식으로 사는 곳이 아닙니다.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옛 습관, 잘못 보고, 듣고, 배운 생각과 삶의 방식을 내려놓는 곳이 광야입니다.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간지 40일이 되었음에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답답해지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물어 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답답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 일 때 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평상시 뭔가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듣다가도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생기면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습관, 옛날 방법대로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할 순간에 죄를 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만들어 책망을 받고 맙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답답하십니까? 여러분의 경험, 생각, 살아온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주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면 광야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배우고 익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려운 일을 당하고 앞길이 막막할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까?
⑴ 잠잠히 기다리라
시편 62편에 1, 5절에 보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요동치 말라, 경거망동하지 말라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뜻입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브라함 링컨'은 어떤 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출14:13절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는 나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행하실 것이다. 고로 나는 가만히 서서 그의 구원을 보리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인간 편에서는 절망은 곧 하나님 편에서 새 소망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 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낙망하여 ‘아!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포기한 후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 할 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은 그런 위기를 모면하려고 기도하기보다는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극한 상황에 직면할 때 아! 이제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위기 속에서 "주님의 구원하심을" 보는 것이 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위기를 당했을 때 방관하시지 않으시고 도와주시는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⑵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라
야곱이 20년 만에 밧단 아람에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대 야곱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외삼촌 집에 있을 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는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곳 까지 왔으니, 형, 에서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 당신께서 20년 전 벧엘에서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므로 그 약속대로 나를 에서의 손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창32:9-11)’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를 만났을 때, 특히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기도해야합니다. 애굽에서 고역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기간이 70년임을 기억하고 기도 했을 대,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도록 조치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붙잡고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에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할렐루야!
⑶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주시고 친구를 주시고 국가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이는 곧 더불어 신앙생활을 할 때 더 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홀로 두지 않고 장정만 60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함께 마음을 모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복을 받을 터인데, 함께 모여 죄를 짓고 서로 미워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자기들끼리 다투고, 지도자와 다투었습니다. 힘든 광야도 서로 사랑하며 지나면 쉽게 통과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됩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표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일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더불어 살도록 하시기 위해 과감하게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리가 걸림돌이 되자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믿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들 인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어려울 때 일수록 더욱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랑하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왜 가족과 가정이 필요합니까?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의지하며, 기쁠 때 서로 기쁨을 나누며 사랑하면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셨고,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려운 형제를 도와주고, 연약한 형제는 싸매주고, 문제만나 고통 중에 있는 형제를 위로해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가고 있음에 너무 감사합니다. 믿음 안에서 모인 형제자매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의 필요를 채우며 흠을 덮어주고 낙심한 사람을 격려하며 함께 더불어 천국 가는 운동을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2.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8절에“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바알브올 사건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민수기 22장 22-2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 대적을 만납니다. 그 대적은 모압 족속인데, 이 모압왕 발락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백성들과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메소포타미아 점쟁이 출신 선지자 발람을 매수하였습니다. 비록 점쟁이 출신이었지만,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져 져 발락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막으셔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게 하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했습니다. 발람은 돈은 받았지만, 발락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그가 알고 있는 하나의 비법을 발락에게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두 가자지는 첫째 우상숭배 하는 것이고 둘째는 간음하는 것입니다. 발람은 발락에게‘이스라엘을 애써 죽이려고 하지도 말고, 저주 하려고 하지도 말라 다만 죄만 짓게 만들면 됩니다.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바알 신당을 만들고, 그 앞에 잔치를 배설하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의 두령들과 제사장 그리고 장로들을 초청하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모압에서 제일 예쁜 여인들을 모아 함께 춤을 추게 하고 혼음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게 됩니다.’ 결국 발락은 발람이 시키는 대로 했고, 발람의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이것이 바알브올의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깨끗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윤리적 도덕적으로 깨끗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과테말라 땅이 참 지저분합니다. 수치를 모르는 땅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오히려 자랑하는 곳이 이곳입니다. 교복 입은 10대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껴안고 사랑을 표현합니다. 우리도 잘 못하면 이런 분위기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죄를 지으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고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죄를 범한 자에게는 징계하십니다. 성도는 순결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성도를 도와주십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깨끗하게 살려고 하면 오히려 요셉처럼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진실하게 바르게 살려고 하면 마귀는 더욱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성도를 도우셔서 승리하게 합니다. 정가가 100 불인 옷에 조금 흠이 있으면 99불을 받는 것이 아니라 10불도 못 받고, 어떤 때는 아예 쓰레기 통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찌게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 속에서 파리 한 마리가 빠졌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파리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 하시면서 파리를 건져내고 식사를 계속하실 분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의 작전은 이런 것입니다. 크게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점 하나 찍어서 옷 전체를 못 쓰게 합니다.
얼마 전 장 상이라는 이대 총장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을 국무총리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경력이 화려했지만, 그 가운데 부동산 투기 경력도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창피만 당하고 구무총리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순결해야 하고 순결을 지키기 위한 댓가도 지불 할 수 있어야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지금 비느하스와 같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민25:11에 보면 바알브올의 사건으로 이스라엘 진영이 난장판에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이 비느하스 입니다. 이 사람은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로서 간음하는 현장을 보고 이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는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순결해야 되지만, 교회 안에 혹 우리 한인 사회 안에 이런 부정한 일이 잇을 대 과감히 나서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일이 우리 형제자매들 사이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으로 부패를 방지하듯이 우리 성도들은 이와 같이 이 사회의 소금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광야와 같은 과테말라에 제일 교회를 세우신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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