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10일 화요일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4)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려면(4)본문/고전10:1-13망매지갈(望梅止渴)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매실을 바라며 갈증을 해소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와 관계가 있는데, 조조 군이 장수를 징벌하는 행군 시에 물어 떨어져 병사들 모두 목이 말라 고통을 격고 있을 때, 조조는 병사들에게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저 앞에 광활한 매실 숲이 있고, 그 매실을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가 충분히 목을 축일 수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상기하고는 입안에 침이 생겨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고사에 기인한 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꼭 필요한 몇 가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물입니다. 사람의 몸의 70%가 물입니다. 그래서 밥은 며칠씩 굶어도 살수 있지만, 물은 하루만 마시지 못해도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런데 광야는 물이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없는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어떨 결에 따라 나온 백성들은 광야에 나와 며칠 지내다 보니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는 비록 종노릇을 하며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경험 했지만, 그래도 물은 풍족했습니다.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친 후에는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온 이후에는 샤워는커녕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망매지갈도 순간입니다. 입에 고인 침으로 갈증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은 많아야 한 두 시간입니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인 물과 양식이 없는 곳입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제일 고통을 많이 당하고, 신앙생활에 자주 넘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의식주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의식주 문제로 인하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두 가지 구체적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겸손히 구하라는 것입니다.(마6:11) 오늘 본문 12절에도“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했습니다. 둘째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천부께서 아시기 때문에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마6:32) 오늘 본문12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둘을 잘 조화 할 수 있을까요? 1.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본문12절에“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누가 선줄로 생각합니까? 첫째. 교만한 사람입니다. 잠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로r된 사람들 가운데 교만해서 패망의 길을 된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다니엘서 4장은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앞에 교만 부리다가짐승처럼 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4:25에“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줄을 아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왕이 계속 교만하면 앞으로 소처럼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있은 후 1년이 지났습니다.("열두 달이 지난 후에"-29절) 이 열두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동안 느부갓네살 임금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려주신 기간입니다. 왜 열두 달을 주셨겠습니까?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주신 날들입니다. 겸손히 자신을 나추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는 계속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회개하라고 주신 "열두 달"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교만했습니다. 29절을 보면"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새"라고 했는데, 이는 옛날 중근동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지붕이 평평하게 되어 있어 위에 올라서 산책을 한다든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음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거닐 새" 라는 말은 계속 혹은 자주 이렇게 지붕에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도 지붕 위에 자주 올라가서 바벨론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자기의 능력, 권세, 위엄, 영광 등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높이며 교만했습니다. 다니엘 4장 30절을 보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 이라고 함으로서 자신과 자신이 세운 바벨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바벨론 성은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깥벽인 외벽의 길이가 17마일, 우리 식으로 하면 20㎞가 넘습니다. 엄청난 크기입니다. 알기 쉽게 설명을 하면 사방 각각 5㎞씩 해서 전체 20㎞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면이 10리가 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벽의 두께가 7미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위로 병거가 얼마든지 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외벽의 두께는 6미터입니다. 벽의 높이는 13미터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대단히 큰 도성이었습니다. 또 바벨론에서 발굴된 벽돌에 보면 전부 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이름이 찍혀 있습니다. 자기의 권세, 자기의 능력, 자기의 위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임금에게 부인이 많이 있었는데, 특별히 사랑했던 부인이 메대의 공주였던 바벨지스 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메데 공주의 고향은 산이 많은 동네였으나, 바벨론은 평지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은 자기 부인을 위해서 바벨론 도성 안에 인공적으로 큰 산을 만들었습니다. 야자나무도 심었습니다. 인공적으로 만든 이 산이 고대 사회에서 애굽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왕궁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라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이 교만을 회개하라고 1년 동안 기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는커녕 계속 자기가 세운 성을 보면 교만을 부렸습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단4:32-33에 보니,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소처럼 생각하는 정신병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기를 인간 이상으로 생각했던 느부갓네살이 반대로 인간 이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한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대 진리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은 자고 즉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는데 오히려 짐승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7년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나만 높이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큰 바벨론 도성은 내 능력과 내 권세로 내가 만들었고 내가 건설했고 내 위엄의 영광을 삼았느니라."(30절)고 하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모르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자기를 높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겸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주여,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오늘도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사울이 겸손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도록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고할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빼앗아서 겸손했던 다윗 임금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겸손한 자, 비천한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둘째. 잘 믿는다고, 오래 믿었다고, 항상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입니다. 약3:1에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고, 마23:8“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했으며, 고전4: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선생은 곧 자신이 많이 알고, 오래 믿었고, 또 잘 믿는 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도 바리새인들의 후예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선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시험 듭니다.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이 걸려듭니다. 자신이 만든 법에 자신이 걸려들어 피곤한 삶을 삽니다. 항상 비판합니다. 그 비판이 자기 목을 조여 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잘 믿는다, 오래 믿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표준이라는 착각에서 벗어 나야합니다. 그 대신 아버지가 되기를 꿈꾸어야 합니다. 믿음의 본을 보이고, 연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안아주고, 잘한 일에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아버지 같은 성도가 되기를 소망해야합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항상 배우는 학생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자신을 살펴보면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배우려고 보면 배워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 때, 은혜를 구하게 되고, 자신의 부족을 알 때,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여 결코 넘어지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본이 도려는 아비의 삶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셋째.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나는 만족해, 이 정도면 됐어 하면서 배부른 돼지같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선줄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창고를 더 크게 짓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12:19) 고 자만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12:20)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 사람의 목표는 오직 돈입니다. 돈을 모으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았습니다. 그 목표가 이루어지자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중에 만나고 나면 괜히 만났다고 후회가 되고, 만난 후 기분이 나쁘며,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무식한데 돈은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돈이면 최고 입니다. 성공도 실패도 돈이 기준입니다. 대화가 안 됩니다. 돈 없는 사람은 무시합니다. 윤리, 도덕, 교양은 물론 믿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이면 다’ 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이 돈 때문에 크게 망하고 실망하고 다치고 죽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가운데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우리가 사는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버는 것이지 돈 버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많이 쌓아놓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주어진 것으로 먹고삽니다. 그러나 다람쥐와 개미, 꿀벌 등의 동물들은 저장을 합니다. 흥미 있는 것은 다람쥐는 저장한 장소를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저장한 대부분의 음식은 썩어버리고, 꿀벌이 저장하는 꿀은 대개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게 빼앗깁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저장한 것도 대개 그 자신의 것으로 돌아가지 않고, 전쟁과 도둑, 재해 등으로 잃어버리기도 하고, 설령 죽을 때까지 재물을 꼭꼭 쥐고 있어도, 대부분을 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봅니다. 돈은 삶을 조금 여유 있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재물로 생명을 맞바꿀 수는 없습니다. 돈 좀 있다고 폼 잡으면 크게 넘어집니다.그렇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번 것을 매일매일 다 쓰면서 살아야 합니까? "내일 죽을 지도 모르니, 오늘 다 쓰고 보자" 하며,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하면서 되는 대로 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돈을 벌든지, 공부를 하든지... 무엇을 하더라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목표를 두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향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선을 베풀라"(눅 12:33), "가난한 이웃, 꼭 필요한 이웃에게 나누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잘 믿는 다고 자부하는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재산이 많은 고로 근심하여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는 이 말을 듣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일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로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고, 예수님을 진지하게 따르려고 하는 자들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새와 다람쥐들 까지도 그의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벌되 분명한 목표 즉 하늘에 쌓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살면 돈이 많고 사업이 잘 되더라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고, 시험하는 마귀를 ‘사람이 떡(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2-14)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큰 목표, 분명한 목적을 가져야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이루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으라.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폭적으로 필요한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은혜롭게 통과하는 방법 중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광야는 시험과 유혹이 많은 곳 입니다. 이 광야에서 시험과 유혹을 잘 이기내야 광야를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은 시험과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시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또 설사 시험을 당했을 지라도 그 시험을 이기도록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말입니다.첫째. 경외는 깊은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공경과 존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존중히 여기며 그분의 다스리심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순종으함으로 바쳤을 때,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12:22)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했지만,(“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욘1:9)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그분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는 말씀을 지킴으로 성취됩니다. 참된 경외는 그분의 뜻을 공경하며, 살아계신 주님이시오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경외는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잠3:7에“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찌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찌어다”라고 햇고, 잠8:13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성품과 상극입니다. 하나님은 자비가 많으신 분이시지만, 죄에 대하여는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악을 미워하고 죄를 멀리합니다.셋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떨리는 마음으로 섬깁니다. "주를 두려워하므로 내 육체가 떨며(tremble)..."(시 119:120). "주를 두려워하며 섬기고, 떨며(trembling) 기뻐할지어다"(시 2:1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너희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trembling)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 :12-13).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는 떨며 섬기지만,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자기 활동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을 의식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더 의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리에서 기도하고, 구제한 후 내가 이렇게 구제했다고 나팔을 불고 다닌다고 책망하시면서 이와 같은 행위는 하나님께 상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6:1) 그러나 로마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행10:2) 넷째. 상 주시는 분임을 믿고 그 상을 얻기 위해 충성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한두 가지 문제를 주신 것은 상 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상 주시기 위함입니다. 신8:2-6에 보니“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 즉 예배, 기도, 구제 뿐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상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복은 ① 구원의 은혜입니다.(“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왕하17:39) ②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복입니다.(“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시119:63) ③ 생명을 보존하고 재앙을 만나지 않는 복입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잠19:23) ④ 번성의 복입니다.(“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전8:12.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출1:21.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시111:5.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22:14)사랑하는 성도여러분!우리가 천국 가는 순간까지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시험과 환란이 와도 걱정 없다 고 장담하면 안 됩니다. 왜냐면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드리며 이 마음으로 평생을 살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은혜롭게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왕 되신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도 고넬료 그리고 이집트 산파와 같이 주를 경외함으로 섬길 수 있는 믿음과 은혜를 주시옵소서. 시편의 기자처럼 “여호와여 주의 도를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를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를 경외케 하소서”라고 기도드리오니 저희들의 중심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과 같이 말씀을 멸시하거나 남보다 좀더 가졌다고 해서 교만부리거나 남 보다 더 잘 믿고 믿음이 좋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오늘의 말씀을 통해 도전받고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진리 안에서 주님과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아직도 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게 나눠 줄 수 있는 자리에 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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