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 3일 목요일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자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리자
본문/마1:18-23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땐, 단체 영화 관람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주로 겨울방학을 하는 날 학교에서 일찍 마치고 단체로 극장에 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때 보았던 영화중에 하나가 바로 『콰이강의 다리』였습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중에 일본군이 태국의 콰이강 위에 철교를 놓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 다리를 놓고 있는 인부들은 연합군 포로들, 일본군이 붙잡아 온 포로병들이었습니다. 하루는 일본군이 이 다리 공사에 중요한 장비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 장교는 분명히 “연합군 포로병들이 이 다리가 놓아지면 일본군에게는 유리해 지는 반면 연합군에게는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예상한 포로들이 아마 어디 훔쳐서 숨기든지, 버렸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전부 포로병들을 불러놓고 협박을 합니다. “이것을 찾아내라! 그렇지 않으면 다 쏴 죽여 버린다!”고. 파리 목숨 같은 이 포로 병사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그 장비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영국군 포로병 한 사람이 나와서 내가 그랬다고 자백을 합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즉시 그 자리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우연히 이 장비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내가 아니면 다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그랬다고 거짓 자백을 하고 희생당한 것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설명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가리켜 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란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요, 그 뜻을 바로 이해할 때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사 임마누엘 되심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채 죽음으로 가면서도 죽음의 길인 줄 모르는 인간들을 구원하사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요3:16) 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 그가 사람 되심은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직 인간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온 인류의 죄인이라고 내가 나쁘다고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당신이 돌아가시려고 제물이 되시려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가 죄가 없으시면서 죄인이 되셔서 앞에 걸어 나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 가장 큰 은혜와 복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 심지어 성도들도 임마누엘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와 복인지 구약 성경을 통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떨면서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때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18:27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섰을 때 “티끌”과 같을 뿐임을 고백했습니다. 욥도 “그러므로 내가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목격하고는 자기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말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은 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합 3:16)라고 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절)고 주께서 말씀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고기가 아주 많아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눅5:8)

임마누엘 -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자기의 생명을 취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대로 우리를 대면하시게 되면 우리 모두는 죽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거역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만 금하셨는데,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어기면 그들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역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당장 죽이시지 않고 살려 주셨습니다. 어떤 죄라도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죄를 범한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심을 보이셨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사실이 우리가 생활 중에 범죄하고서도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거나, 또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남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중의 죄에 대해 의분으로 처결하실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법대로 우리를 처리 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항의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하실 충분한 권한과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이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바르기 때문이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너무 젖어 있어서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처결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여길 정도로 깊은 착각과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세상 살아갈 때에 문제가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져도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들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라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 - 자비의 하나님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에게「대머리여! 대머리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곰을 두 마리씩이나 보내 그 아이들 42명을 모두 찢어 죽이도록 하신다는 말인가?(왕하2:23-24) 또 나답과 아비후가 술이 좀 취해서 성전의 향로를 들고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녔다고 해서 임직식 바로 그 날에 그들을 죽이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레10:1-2),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수레에서 떨어지려 하는 언약궤를 붙들려고 손을 좀 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죽이신다는 말인가?(삼하6:6-7),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약간 교만했다고 52년간 충직했던 왕에게 문둥병을 내리신다는 말인가?(왕하15:1-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벌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넘기시는가?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는가?(행5:1-10),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드리겠다고 말한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우리 역시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하고도 드리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실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간음하였는데 왜 그 사람만 죽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간음을 행한 모든 사람들이 죽이시지 않고 살려두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행하신다면 저와 여러분 중 사지백체를 정상적으로 소유 하고 계실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워 주고, 또 죄에 대한 심판을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한 예증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고전10:5-12).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하나님에서 거룩치 못한 것들에 대해 거룩한 방식인 공의를 행하신 경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모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불공평하실 수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성이 그처럼 침해를 당하셨는데도 어떻게 그러한 자비를 보이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죄 된 생활 가운데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고전 11:27-32)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많이 범죄한 생활을 하면서 성찬에 참여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변하게 하셨는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비슷한 세상적 습관을 행하고 육체의 일을 그렇게도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는 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시지 않는가?”가 문제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왜 하나님께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땅으로 입을 벌려 그들을 삼키게 하셨는가?”(민16:23-33)라고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역시 거역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땅 속으로 삼켜 버리지 않으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측면에서 사건들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로 알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우심을 바로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 - 겸손히 회개하라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른 채 교만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눅13:1-5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대가 성전에 들어와서 갈릴리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희생 제물의 피에다 그들이 죽인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또는 ”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도 똑바로 생활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임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문제를 거꾸로 보았습니다. 나에게도 당연히 닥쳐야 할 문제를 지금까지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심으로 막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결코 이런 일들이 닥치면 안 되는 존재로 생각하고 혹시 나에게 또는 주변에 닥치면 왜 이런 일이 생겨야 되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12:28-29에서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요,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죽게 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죄를 보시면 분노하시고 불로서 태워버리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허물과 죄가 셀 수 없음만큼 많은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 낮아지신 하나님
이 사실을 인정 할 때,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위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당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어야 할 존재가 죽지 않고 오히려 그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입게 됩니다. 상상 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이 곧 임마누엘입니다. 예컨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였습니다. 성막을 세웠는데 그 성막 위에 낮이면 구름 기둥이 섰고 밤이면 그것이 불기둥으로 변하여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할 때에 발생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양식문제가 해결되었고, 물 문제도 해결되었고, 고기가 먹기 싶다고 했을 때에 그 문제도 해결되었고, 범죄한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일도 해결되었고, 외적이 침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외적도 물리칠 수가 있었고,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 할 때에 구름 기둥의 인도만 받으면 되었으니 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이 임마누엘의 은총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받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임마누엘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죄인이 싫어하고 사단과 함께 하는 자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은 임마누엘을 환영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임마누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는 약하고, 모르는 것이 많고, 감당할 힘도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강하고, 모든 것을 아시고, 풍족하시니 임마누엘이면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임마누엘의 은총을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임마누엘이 되면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집안에는 어른이 계셔야 질서가 잡힙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사람답게 삽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내 욕심대로만 살고 타락한 정욕대로만 살다가 결국에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을 의식하면서 살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게 되고 그리고 영원한 나라에서 상급을 받는 자로 서게 됩니다.

임마누엘 - 사람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친히 사람이 되시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심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과 더 친해지고 더 가까워지고, 아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죄 문제를 친히 해결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마1:23)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힘 중에 가장 큰 힘, 능력 중에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냐? 임마누엘입니다. 성탄절은 무엇 하는 날입니까? 임마누엘을 기억하고 임마누엘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성탄절에 가장 중요한 이 임마누엘의 믿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도시에서 성탄절을 맞아 신청 앞에 세워놓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 모형 중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간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찾아온 동방박사와 들에서 달려온 목자들의 모습까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심지어 포대기도 말구유도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었습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트리도, 즐거운 음악도,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받게 되어도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없는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33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임마누엘 - 내(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
예수의 승천 후에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곁에 게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우리의 몸을 당신의 집으로 여기시고 함께 하십니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니 힘을 얻고 놀라운 일들을 감당했습니다. 나가서 전도했더니 그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이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임마누엘이 현실로 나타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따라가면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프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목회, 행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여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임마누엘하신 주님이 사실이라면 내 집에, 교회에, 내 직장에, 내 사업에 역사해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면 됩니다. 초대교회가 왜 축복을 받았습니까? 마가 다락방에 모여 앉아서 꼼짝하지 않고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날로부터 움직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큰 축복이 임마누엘입니다. 다른 것 하지 말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은 골2:8-10절에 다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났다 못났다는 그것도 다 속이는 것입니다. 사64:4-6절에, 우리는 다 헌 누더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만나야 승리하고, 하나님의 축복 받아야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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